처음 자취방을 구하러 다니던 날, 저는 설렘보다 걱정이 먼저였습니다. 혼자 계약서를 보고, 월세와 관리비를 따져보고, 앞으로의 생활을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는 사실이 생각보다 무겁게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영화 《초행》을 보고 나서 그 기억이 다시 떠올랐습니다. 미술 강사 수현과 방송국 계약직 지영, 두 사람이 서로의 가족 앞에 서는 장면들은 낯선 길 위에 처음 서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느껴봤을 그 떨림과 꼭 닮아 있었습니다. 《초행》은 결국 독립과 결혼이라는 큰 선택 앞에서, 사람이 얼마나 서툴고 불안한 존재인지를 보여주는 영화였습니다. 가족 갈등, 밥상 위에서 터지는 것들지영의 어머니가 결혼 이야기를 꺼내는 순간, 밥상 위의 공기가 달라집니다. 수현은 자리를 피하고, 지영은 울음을 참습니다. ..
졸업하고 나서 처음 몇 달은 "우리 곧 보자"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곧'이라는 약속은 1년이 지나도록 현실이 되지 않았습니다. 싸운 것도 아니고, 누군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자연스럽게 멀어지는 관계가 있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영화 성적표의 김민영은 바로 그런 어색한 거리감, 아무도 나쁜 사람이 아닌데 조금씩 멀어져 버린 감정을 스크린에 그대로 옮겨놓은 작품입니다. 제 22회 전주국제영화제 한국 경쟁 대상을 받은 임지선·이재은 감독의 공동 연출작으로, 2023년 9월 8일 개봉했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가 오래 남는 이유는 거창한 사건 때문이 아니라, 누구나 한 번쯤 경험했을 관계의 변화를 아주 현실적으로 담아냈기 때문입니다. 삼행시 클럽이 해체되던 날영화는 고3 ..
저는 처음 중고거래를 하던 날이 아직도 기억납니다. 거래 장소로 가는 지하철 안에서 온갖 걱정을 했습니다. 그런데 거래는 3분 만에 끝났습니다. 그날 알았습니다. 두려웠던 건 현실이 아니라 시작하기 전의 상상이었습니다. 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를 보면서 그날의 기억이 자연스럽게 떠올랐습니다.인물분석 — 찬실은 왜 특별하지 않아서 특별한가영화의 주인공 찬실은 살리라 감독 지명수의 현장 프로듀서입니다. 찬실은 오랫동안 영화 현장에서 프로듀서로 일해 온 사람입니다. 그 감독이 심장마비로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찬실은 영화사 대표에게 해고를 통보받습니다. 일도, 돈도, 그리고 자신이 속해 있던 세계 자체를 한 번에 잃는 것입니다.보통 이런 서사라면 주인공이 눈물로 침대를 적시거나, 분노해서 뭔가를 부수거나, 아니면..
가족과 4년을 거의 연락 없이 지낸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이 영화를 보는 내내 남의 이야기 같지 않았습니다. 2019년 개봉한 독립영화 '니나 내나'는 도망간 엄마를 찾아 길을 떠나는 삼남매의 이야기입니다. 완벽한 화해도, 극적인 해피엔딩도 없지만, 보고 나면 오랫동안 마음에 남는 작품입니다.가족이 없어서 불행한 게 아니라, 있어서 더 힘들다는 걸 아십니까영화 속 삼남매 역시 가족 때문에 가장 큰 상처를 안고 살아갑니다. 사춘기 시절 엄마와 크게 싸운 뒤 집을 나와 4년 가까이 연락하지 않았던 제 경험이 떠올라, 이 이야기가 남의 일처럼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저는 오랫동안 '가족은 무조건 좋은 것'이라는 말이 불편했습니다. 사춘기 시절 엄마와 크게 싸운 뒤 집을 나와 4년 가까이 제대로 연락을 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