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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자취방을 구하러 다니던 날, 저는 설렘보다 걱정이 먼저였습니다. 혼자 계약서를 보고, 월세와 관리비를 따져보고, 앞으로의 생활을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는 사실이 생각보다 무겁게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영화 《초행》을 보고 나서 그 기억이 다시 떠올랐습니다. 미술 강사 수현과 방송국 계약직 지영, 두 사람이 서로의 가족 앞에 서는 장면들은 낯선 길 위에 처음 서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느껴봤을 그 떨림과 꼭 닮아 있었습니다. 《초행》은 결국 독립과 결혼이라는 큰 선택 앞에서, 사람이 얼마나 서툴고 불안한 존재인지를 보여주는 영화였습니다.
가족 갈등, 밥상 위에서 터지는 것들
지영의 어머니가 결혼 이야기를 꺼내는 순간, 밥상 위의 공기가 달라집니다. 수현은 자리를 피하고, 지영은 울음을 참습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어머니가 지영의 가방에서 임신 테스트기를 발견하면서 상황이 한순간에 폭발합니다. 저도 예전에 가족들 앞에서 앞으로의 계획을 이야기해야 했던 자리가 있었습니다. 큰 갈등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앞으로 어떻게 할 거냐"라는 질문 하나가 생각보다 무겁게 느껴졌습니다. 그때 가장 어려웠던 건 질문 자체가 아니라, 나도 아직 정리하지 못한 미래에 대한 답을 다른 사람에게 설명해야 한다는 점이었습니다. 괜찮은 척 대답했지만,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내가 정말 잘하고 있는 걸까'라는 생각이 계속 남았습니다.
흥미로운 건 감독이 이 장면들을 대본 없이 찍었다는 점입니다. 즉흥 연출(Improvisation)이란, 배우에게 구체적인 대사 대신 상황과 큰 틀만 주고, 그 순간 발생하는 감정을 자연스럽게 담아내는 촬영 방식입니다. 그래서인지 지영의 어머니가 "폭주"하는 장면은 연기처럼 보이지 않았습니다. 제 경험상 이런 장면은 계산된 대사보다 훨씬 더 깊이 박힙니다.
수현 쪽 가족도 다르지 않습니다. 술에 취한 아버지가 소리를 지르고, 형은 수현을 나무라고, 지영은 이상한 분위기를 감지하고 자리를 수습하려 합니다. 두 가족의 밥상 장면이 교차하면서 영화는 한 가지 사실을 조용히 드러냅니다. 어느 집이든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말하지 못한 것들이 쌓여 있다는 것입니다.
- 지영 어머니의 결혼 압박 → 임신 테스트기 발견으로 이어지는 밥상 파국
- 즉흥 연출 방식으로 촬영해 배우의 날것 감정이 그대로 살아 있음
- 수현 가족의 식사 자리도 술 취한 아버지의 고성으로 끝남
- 두 집 모두 결혼과 미래를 둘러싼 갈등이 밥상 위에서 폭발하는 구조
독립 불안, 방 하나를 구하는 일의 무게
수현과 지영은 임대주택을 전전하며 살아갑니다. 7년 차 미술 강사와 방송국 계약직. 안정적이지 않은 직업, 정해지지 않은 미래. 그게 두 사람의 일상입니다. 영화는 그 불안정함을 드라마틱하게 과장하지 않습니다. 그냥 보여줄 뿐입니다.
처음 자취방을 구하러 다닐 때 저도 비슷한 감각을 느꼈습니다. 부동산에 처음 들어가는 것 자체가 어색했고, 관리비나 계약 조건이 무슨 뜻인지 잘 몰랐지만 물어보기가 망설여졌습니다.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방 하나 구하는 일이 이렇게 낯설 줄은 몰랐습니다. 국토교통부 통계에 따르면 2023년 기준 1인 가구는 전체 가구의 약 34.5%로, 이미 가장 흔한 가구 형태가 됐습니다. 그렇게 많은 사람이 혼자 살기 시작하지만, 처음이라는 감각은 모두에게 낯설게 옵니다.
독립 불안(Independence Anxiety)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여기서 독립 불안이란 보호받던 환경에서 벗어나 혼자 결정을 내려야 할 때 생기는 심리적 불안정 상태를 말합니다. 수현이 형의 전화를 피하고, 아버지 환갑잔치 참석을 망설이는 장면들도 이 맥락에서 읽히는 것 같았습니다. 가족과의 연결고리를 유지하면서도 내 방식으로 살겠다는 두 힘이 충돌할 때 생기는 망설임. 제 경험상 이 감각은 방을 구한 뒤에도 한동안 계속됩니다.
어른 되기, 정답 없이 한 걸음 내딛는 일
지영은 임신 가능성을 수현에게 털어놓으며 이렇게 말합니다. "엄마 같은 엄마가 될까 봐 겁난다고." 이 한 문장이 영화 전체를 관통한다고 느꼈습니다. 다음 날 아침, 지영은 임신 테스트기 결과를 확인하려다 두려움에 멈춥니다. 결과를 보는 게 두려운 게 아니라, 그 이후의 선택이 두려운 것입니다.
영화는 이 장면에 대한 답을 주지 않습니다. 《초행》의 연출 방식은 내러티브 열린 결말(Open Narrative)을 의도적으로 선택합니다. 여기서 열린 결말이란 관객에게 명확한 해답을 제시하지 않고, 각자가 스스로 의미를 완성하도록 서사를 열어두는 기법입니다. 처음에는 이게 조금 답답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곱씹다 보니 그게 가장 솔직한 방식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실제로 인생의 중요한 순간들은 영화처럼 극적으로 해결되지 않으니까요.
국내 심리학 연구에서도 청년기의 심리적 유예 상태를 가리키는 개념이 있습니다. 성인 진입기(Emerging Adulthood)가 바로 그것입니다. 성인 진입기란 청소년도 아니고 완전한 성인도 아닌 시기, 다양한 역할을 탐색하며 정체성을 형성해 가는 심리 발달 단계를 뜻합니다(출처: 학술연구정보서비스 RISS). 수현과 지영이 갈팡질팡하는 모습은 결함이 아니라 그 시기에 누구나 통과하는 과정인 셈입니다.
저 역시 처음에는 불안이 사라진 뒤에야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막상 혼자 살아보니 불안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선택하고 책임지는 과정 속에서 조금씩 익숙해지는 감정이라는 걸 알게 됐습니다. 그래서 수현과 지영의 서툰 모습이 단순히 답답하게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영화 《초행》은 어떤 장르인가요, 결말이 있긴 한가요?
A. 《초행》은 드라마 장르의 독립영화입니다. 의도적으로 열린 결말을 택한 작품으로, 임신 테스트기 결과나 두 사람의 관계가 어디로 가는지 명확하게 보여주지 않습니다. 빠른 결말을 기대하고 보면 답답할 수 있지만, 그 여백이 이 영화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Q. 즉흥 연출로 찍은 영화인데 배우 연기가 어색하지 않나요?
A. 오히려 반대였습니다. 대본 없이 상황과 큰 틀만 주고 찍은 즉흥 연출 방식 덕분에 지영 어머니의 잔소리 장면이나 밥상 갈등 장면이 연기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실제로 집에서 벌어지는 대화처럼 느껴져서 더 불편하고 더 공감이 됩니다.
Q. 독립이나 자취를 앞두고 있는데 이 영화가 도움이 될까요?
A. 실용적인 정보는 없지만, 감정적인 위로는 있습니다. 처음이라는 이름 아래 불안해하는 게 나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걸 확인하는 용도로는 꽤 효과적입니다. 제 경험상 자취를 막 시작한 시기에 보면 더 와닿을 것 같습니다.
Q. 가족 갈등 장면이 불편하게 느껴질 수도 있나요?
A.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특히 지영 어머니의 결혼 압박이나 수현 아버지의 고성 장면은 유사한 경험이 있는 분들께 꽤 날카롭게 닿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불편함이 의도된 것이고, 그게 이 영화가 정직하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결론
《초행》을 보고 나서 한동안 멍했습니다. 화려한 장면도, 극적인 반전도 없는데 머릿속에 오래 남았습니다. 수현과 지영이 갈팡질팡하며 서툴게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이, 처음 자취방 현관문을 열던 날 제가 느꼈던 그 복잡한 감각과 너무 닮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영화는 어른이 되는 일에 정답이 없다는 걸 조용히, 그리고 솔직하게 보여줍니다. 두려워하면서도 한 발 내딛는 것 자체가 성장이라는 걸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작품입니다. 독립이나 결혼, 임신처럼 큰 결정 앞에서 망설이고 있다면, 이 영화를 한 번 보시는 걸 권해드립니다. 답을 주진 않지만, 적어도 "나만 이렇게 서투른 게 아니구나"라는 위로는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