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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적표의 김민영 (삼행시 클럽, 우정 변화, 하이퍼리얼리즘)

creator25754 2026. 7. 31. 19:04

목차


    성적표의 김민영

    졸업하고 나서 처음 몇 달은 "우리 곧 보자"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곧'이라는 약속은 1년이 지나도록 현실이 되지 않았습니다. 싸운 것도 아니고, 누군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자연스럽게 멀어지는 관계가 있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영화 성적표의 김민영은 바로 그런 어색한 거리감, 아무도 나쁜 사람이 아닌데 조금씩 멀어져 버린 감정을 스크린에 그대로 옮겨놓은 작품입니다. 제 22회 전주국제영화제 한국 경쟁 대상을 받은 임지선·이재은 감독의 공동 연출작으로, 2023년 9월 8일 개봉했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가 오래 남는 이유는 거창한 사건 때문이 아니라, 누구나 한 번쯤 경험했을 관계의 변화를 아주 현실적으로 담아냈기 때문입니다. 



    삼행시 클럽이 해체되던 날

    영화는 고3 수험생이 된 세 친구, 김민영·최수산나·정희가 '삼행시 클럽'을 해체하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거창한 다툼이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그냥 입시 앞에서 동아리를 계속 유지하기가 어려워진 것뿐입니다. 처음엔 "당연한 수순이지"라고 생각했는데, 보다 보니 그 해체 장면이 영화 전체의 분위기를 미리 압축해두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삼행시라는 형식이 흥미롭습니다. 삼행시(三行詩)란 주어진 단어의 각 글자를 첫 글자로 삼아 세 줄짜리 시를 짓는 언어 놀이로, 즉흥성과 재기(才氣)가 핵심입니다. 여기서 재기란 상황에 맞는 기지 넘치는 표현력을 뜻합니다. 클럽이 해체된다는 건 민영의 삼행시, 즉 그 즉흥적이고 고정될 수 없는 감각이 이제 다른 방향으로 흘러갈 것임을 암시하는 장치처럼 보였습니다.

    요즘은 입시를 고려해 동아리를 선택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는 점을 생각하면, 삼행시 클럽은 오히려 낯설 만큼 순수합니다. 제가 학교 다닐 때도 이런 클럽이 있었으면 어땠을까 싶을 만큼요. 그 순수함이 해체라는 사건과 부딪히면서 영화는 첫 장면부터 묘한 서운함을 심어놓습니다. 졸업을 앞두고 진짜 소중한 것들이 자연스럽게 밀려나는 느낌, 저도 그 감각을 꽤 알고 있습니다.

    • 삼행시 클럽 해체: 다툼 없이 현실에 의해 사라지는 관계의 시작
    • 삼행시 형식: 즉흥성과 재기, 고정될 수 없는 청춘의 감각을 상징
    • 제22회 전주국제영화제 한국경쟁 대상 수상작 (출처: 전주국제영화제)
    요약: 삼행시 클럽의 해체는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아무도 나쁜 사람이 없어도 소중한 것이 사라지는 영화 전체의 정서를 압축한 첫 신호탄입니다. 

     

    졸업 후 친구와 멀어지는 건 자연스러운 걸까 

    스무 살 이후 세 친구의 삶은 극적으로 갈라집니다. 수아는 하버드로, 민영은 간호학과에서 편입을 준비하고, 정희는 테니스장 아르바이트를 합니다. 저는 이 장면 배치가 정말 정직하다고 느꼈습니다. 입시까지는 비슷한 레일 위에 있던 친구들이, 그 이후엔 전혀 다른 속도와 방향으로 달려가는 것을 영화는 과장 없이 보여줍니다.

    이 영화를 하이퍼리얼리즘(hyperrealism) 작품이라고 부르는 시각이 있습니다. 하이퍼리얼리즘이란 극적인 사건이나 과장 없이 현실을 있는 그대로, 때로는 현실보다 더 세밀하게 포착하는 창작 방식입니다. 영화 성적표의 김민영은 바로 그 방식으로 우정 변화를 다룹니다. 정희가 서울 방문을 고대하고, 민영에게 서운함을 느끼는 감정선이 그렇습니다. 아무 말도 없었는데 어쩐지 멀어진 느낌, 저도 그 경험이 있습니다.

    졸업 전까지만 해도 저는 친구가 제 삶에서 가장 큰 존재라고 생각했습니다. 힘든 일이 있을 때 가장 먼저 찾는 사람도 친구였고, 졸업을 해도 지금처럼 계속 연락하며 지낼 거라고 당연하게 믿었습니다. 그래서 졸업식 날에도 "우리 자주 보자", "시간 맞춰서 꼭 만나자"라는 말을 자연스럽게 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학교를 벗어나니 상황은 생각보다 빠르게 달라졌습니다. 각자 취업 준비를 하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다 보니 연락하는 횟수는 조금씩 줄어들었습니다. 처음에는 친구들이 변한 것 같아 서운했습니다. 예전처럼 먼저 연락해주길 기다리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돌아보니 저 역시 친구의 연락을 바로 확인 하지 않고, 바쁘다는 이유로 답장을 미루고 있었습니다. 예전에는 하루에도 몇 시간씩 이야기하던 친구였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나중에 답해야지"라는 생각으로 넘기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돌이켜보면 친구가 변한 것이 아니라 저 역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느라 관계를 뒤로 미루고 있었던 것입니다. 

    처음에는 정희가 조금 답답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 다시 떠올려보니, 정희는 변화를 받아들이는 속도가 조금 느렸던 사람일 뿐이었습니다. 저 역시 졸업하고 친구들과 멀어졌을 때 같은 마음이었기 때문입니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잃는 것도 있어야 새로운 것이 채워진다는 말은 맞지만, 그 잃음이 아프지 않다는 뜻은 아니니까요. 비교문화 연구에서도 우정 유지에 있어 생애 전환기(life transition)가 결정적 변수로 작용한다는 점은 반복적으로 확인됩니다(출처: American Psychological Association). 여기서 생애 전환기란 졸업, 취업, 이사처럼 삶의 구조가 바뀌는 시점을 뜻합니다.

    요약: '성적표의 김민영'은 누군가의 잘못으로 끝나는 관계가 아니라, 각자의 삶이 생기면서 자연스럽게 변하는 우정의 모습을 현실적으로 보여준다.

     

    현실을 더 현실답게 만드는 유머 

    영화 성적표의 김민영이 무겁지 않은 이유가 있습니다. 영화는 감정적으로 진지한 장면 사이사이에 예상치 못한 유머를 끼워 넣습니다. 이동진 평론가가 "만물이 정지한 순간에 끼어 들어오는 삐질 같은 감각과 센스"라고 표현한 게 바로 이 지점입니다. 저는 이 표현을 읽고 나서 다시 몇몇 장면을 떠올렸는데, 정말 정확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희가 테니스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장면은 그 자체로 작은 코미디입니다. 변기 속 테니스 공이라는 황당한 소품, 빙수를 만들다 실수하는 귀여운 장면들이 이어집니다. 제가 처음 보면서 소리 없이 웃었던 건 정희가 아르바이트에 진심인데 사장님이 오히려 부담스러워하는 그 역전의 구도 때문이었습니다. 열심히 하면 오히려 민폐가 되는 그 아이러니, 학창 시절이나 사회 초년생 시절에 한 번쯤 맞닥뜨리는 상황 아닌가요. 제 경험상도 그런 적이 분명히 있었습니다.

    민영이 성적 정정 메일을 쓰는 장면도 마찬가지입니다. 간호학과 편입을 준비하는 민영이 성적 때문에 교수에게 메일을 쓰는 장면인데, 그 메일의 내용과 어조가 어찌나 현실적이고 황당한지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습니다. 웃기면서도 동시에 "나도 저런 메일 한 번쯤 보내봤지"라는 공감이 겹쳐지는 순간이었습니다.

    영화 속 미장센(mise-en-scène)도 이 유머를 뒷받침합니다. 미장센이란 화면에 배치되는 모든 시각적 요소, 즉 구도·소품·색감·인물 배치를 포괄하는 영화 용어입니다. 감독이 테니스장을 배경으로 선택한 것 역시 우연이 아니라, 숲의 이미지와 시각적으로 연결하기 위한 의도적 선택이었다는 비하인드가 있습니다. 독특한 구도와 소품 선택 하나하나에 의미가 담겨 있는 셈입니다. 그 디테일들 덕분에 영화는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은 절묘한 온도를 유지합니다.

    요약: 영화 곳곳에 배치된 유머와 의도적 미장센은 우정과 멀어짐이라는 무거운 주제에 숨구멍을 내주며, 관객이 자기 경험을 자연스럽게 투영할 여지를 만들어냅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성적표의 김민영》은 어디서 볼 수 있나요?

    A. 2023년 9월 8일 극장 개봉 후 시리즈온(Series On)에서도 서비스된 바 있습니다. 현재 어느 플랫폼에서 스트리밍 중인지는 변경될 수 있으니, 검색창에 제목을 직접 입력해서 최신 서비스 여부를 확인하는 게 가장 빠릅니다.

     

    Q. 이 영화, 잔잔해서 지루하지 않나요?

    A. 사건보다 감정의 결로 이야기가 흘러가기 때문에 극적인 전개를 기대하면 다소 낯설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반면 일상의 디테일과 유머에서 공감을 느끼는 분들은 오히려 "이게 나 얘기인데"라고 느끼실 가능성이 높습니다. 저는 후자 쪽이었습니다.

     

    Q. 전주국제영화제 수상작이면 어렵거나 난해한 영화 아닌가요?

    A. 난해한 예술영화라기보다 하이퍼리얼리즘 계열의 일상 드라마에 가깝습니다. 서울독립영화제 등 여러 영화제를 거친 작품이지만, 독립영화를 처음 접하는 분들도 충분히 감정 이입이 가능한 영화입니다. 화려한 연출보다 공감의 밀도가 높은 작품입니다.

     

    Q. 영화에서 세 친구 중 누구에게 공감하게 되나요?

    A. 이건 보는 사람마다 다르다는 의견이 많습니다. 정희의 느긋함과 무기력함에 공감한다는 분들도 있고, 민영처럼 무언가를 계속 쫓아가는 모습이 더 익숙하다는 분들도 있습니다. 저는 솔직히 민영 쪽에 더 가까웠는데, 보고 나서 정희가 더 오래 기억에 남았습니다.

     

    결론

    영화 성적표의 김민영은 화려한 사건 하나 없이도 사람의 마음에 오래 남는 영화입니다. 졸업 사진을 꺼내 볼 때마다 드는 그 복잡한 감정, "우리 정말 친했는데"라는 그리움과 "근데 지금은 이렇게 됐네"라는 담담함이 공존하는 그 감각을 영화가 잘 붙잡고 있었습니다.

     

    저 역시 졸업 후 친구들과 자연스럽게 멀어지는 경험을 하면서, 예전처럼 자주 만나지 않는다고 해서 관계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는 걸 조금씩 받아들이게 됐습니다. 오히려 중요한 건 과거처럼 계속 붙잡고 있는 것이 아니라, 변한 관계를 인정하면서도 서로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마음이라는 걸 알게 됐습니다. 그래서 이 영화를 보고 나서 오랜만에 먼저 친구에게 연락을 했습니다. 

    참고: https://youtu.be/UsynOX2 JgTY? si=gXiB7 d6 Gv6 UKfl7 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