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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예전에는 누가 부당한 일을 당하면서도 끝까지 별말 하지 않으면, 그 사람을 조금 답답하게 보는 편이었습니다. 왜 저기서 한마디를 못 하지, 왜 그렇게까지 참고 있지 싶었던 적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 그 사람이 약해서 못 움직인 게 아니라 애초에 혼자 버티기엔 너무 불리한 자리에 서 있었던 경우가 많았습니다. 영화 〈왕과 사는 남자〉를 보면서 자꾸 그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이 영화는 권력을 가진 사람보다, 그 권력 앞에서 쉽게 목소리를 낼 수 없었던 사람들의 자리를 오래 바라보게 만드는 작품이었습니다.
킹메이커 한명회, 우리가 알던 간신의 이미지가 아니었다
이 영화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유지태 배우가 연기한 한명회였습니다. 보통 사극에서 한명회는 교활하고 왜소한 인상의 모사꾼으로 그려지는 경우가 많은데, <왕과 사는 남자>의 한명회는 달랐습니다. 키가 크고 잘생겼으며, 뭔가를 단호하게 결정하는 인물처럼 보였습니다. 이건 실제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 근거한 묘사라고 합니다.
킹메이커(kingmaker)란 직접 권좌에 오르지 않고 왕을 만들어내는 배후 실세를 뜻합니다. 쉽게 말해 무대 뒤에서 모든 것을 조종하는 사람인데, 한명회가 바로 그 역할이었습니다. 수양대군이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건 그의 야망만큼이나, 그 야망을 설계하고 실행에 옮긴 한명회의 존재가 컸습니다.
유지태 배우는 이 역을 위해 몸무게를 100kg까지 증량했다고 합니다.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단순히 분위기만 잡는 게 아니라 체형 자체를 바꿔서 위압감을 만들어냈다는 게 인상적이었습니다. 영화를 보는 내내 한명회가 화면에 등장하면 공기가 달라지는 느낌이 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이 캐릭터가 조금 더 많이 나왔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도 있었습니다.
실제 조선왕조실록에는 한명회의 체격이 크고 외모가 뛰어났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영화는 이런 기록을 바탕으로 기존 사극에서 익숙했던 교활한 간신의 이미지를 벗어나 묵직한 존재감을 가진 정치가로 그려냅니다. 유지태 역시 100kg까지 증량하며 화면을 압도하는 한명회를 완성했고, 덕분에 계유정난의 배후에서 판을 움직이는 인물이라는 설정에도 설득력이 더해졌습니다. 저는 단순히 역사적 사실을 재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익숙했던 한명회라는 인물을 새롭게 바라보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캐릭터 해석이 상당히 성공적이었다고 느꼈습니다.
계유정난이 만들어낸 아이러니, 누가 역적이고 누가 공신인가
영화를 보면서 제가 가장 오래 생각하게 된 질문이 하나 있었습니다. "성공한 쿠데타에 박수를 치는 게 괜찮은 걸까?" 장항준 감독이 이 영화를 시작하게 된 출발점이 바로 그 질문이었다고 합니다. 저는 그 말이 꽤 오래 머릿속에 남았습니다.
계유정난(癸酉靖難)은 1453년 수양대군이 일으킨 정변을 말합니다. 여기서 계유정난이란 단종을 보좌하던 신하들을 제거하고 수양대군이 실권을 장악한 사건으로, 쉽게 말해 적통 왕위 계승자의 편에 서 있던 사람들이 역적이 되고, 그 왕을 몰아낸 사람들이 공신이 된 사건입니다.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역사적 사실만 보면 결과는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하지만 영화는 그 결과보다 그 과정에서 사람들이 어떤 선택을 했는지를 더 오래 바라봅니다. 그 구조가 이 영화에서 가장 불편하게 다가왔습니다. 단종을 지키려 했던 신하들은 역적이 되었고, 그를 몰아낸 신하들은 정난공신(靖難功臣)이 되었습니다. 정난공신이란 정변에 가담하여 공을 세운 인물에게 내리는 훈호로, 이 사건에서는 수양대군을 도운 인물들이 그 지위를 받았습니다. 정의와 반역의 기준이 오직 권력이었다는 사실이 사극이라는 장르를 넘어 지금 이 시대와도 겹쳐 보였습니다.
저는 대학교 시절에 한 명이 뭔가를 잘못했다는 이유로 여학생 전체가 강의실에 불려 가 선배들에게 혼났던 기억이 있습니다. 문을 잠가놓고, 복장이 너무 노출이 심하다고, 화장이 진하다고요. 지금 생각하면 그건 그냥 텃세였는데, 그 당시에는 그게 관례처럼 받아들여졌습니다. 누군가의 기준이 집단의 규칙이 되고, 그걸 따르지 않으면 이상한 사람이 되는 구조가 계유정난의 그것과 묘하게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스케일은 전혀 다르지만, "힘 있는 쪽이 기준을 정한다"는 원리만큼은 같았습니다. 단순히 역사적 사건을 설명하는 데 그치지 않고, 권력이 정의의 기준을 어떻게 바꾸는지를 자연스럽게 생각하게 만든다는 점이 이 영화의 가장 큰 장점 중 하나라고 생각했습니다.
결말을 알고 봐도 단종에게 마음이 가는 이유
사극을 볼 때 결말을 안다고 해서 감정이 덜 흔들린다는 건 착각이었습니다. 제가 직접 봐봤는데, 단종복위 시도 장면은 알고 보는데도 손이 땀이 났습니다. 결과를 알고 있다는 게 오히려 더 안타깝게 만들었습니다.
단종복위(端宗復位)란 폐위된 단종을 다시 왕위에 올리려는 시도를 뜻합니다. 영화 속에서는 경북 순흥으로 유배된 금성대군을 중심으로 거사가 계획되지만 발각되고, 금성대군과 이 보음은 처형당합니다. 단종은 영월 유배지에서 결국 사사(賜死), 즉 왕이 신하에게 독약을 내려 죽게 하는 형벌을 받습니다. 출처: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이미 결말을 알고 있는 역사인데도 긴장감이 유지되는 이유는, 영화가 역사적 사실보다 인물들의 감정에 집중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장항준 감독은 단종을 나약한 인물로 그리고 싶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실제로 조선왕조실록에는 단종이 활쏘기에 능하고 총명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폐위당했다는 사실이 나약함의 증거가 아니라는 감독의 시각이, 저는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태도라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영화는 야사에 등장하는 통인이 단종을 죽이는 이야기를 재해석합니다. 어몽도의 손에 단종이 죽게 되는 결말은, 단종이 스스로 마지막 선택을 내린 사람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불쌍해서 마음이 가는 게 아니라, 그가 놓인 자리가 너무 불공평해서 마음이 가는 쪽에 더 가까웠습니다. 저도 영화를 다 보고 나서 그 감정이 꽤 오래 남았습니다.
실제 역사에서도 단종복위 시도는 금성대군을 중심으로 계획됐지만 결국 발각되어 실패했습니다. 단종은 사사라는 형식으로 생을 마감했고, 영화는 이 과정을 야사를 재해석해 어몽도와의 관계 속에서 풀어냅니다. 여기에 박지훈 배우의 절제된 눈빛 연기까지 더해지면서 단종이 느꼈을 두려움과 존엄이 더욱 깊게 전달됐습니다. 만약 이 장면이 과한 감정 연기로 표현됐다면 오히려 설득력이 떨어졌을지도 모릅니다. 절제된 연기였기에 단종이라는 인물이 더 오래 기억에 남았습니다.
배우들의 연기와 디테일이 돋보였던 사극
영화의 가장 큰 장점을 꼽으라면 단연 배우들의 앙상블입니다. 제 경험상 사극 영화에서 한 명이 튀어나와 혼자 잘하는 경우는 있어도, 이렇게 조연까지 구멍이 없는 경우는 드뭅니다. 유해진의 어몽도는 극 초반의 느린 흐름을 혼자서 잡아당기고, 박지훈의 단종은 대사보다 표정으로 더 많은 걸 전달합니다.
감독 본인도 초반 연출에 아쉬움이 있다고 인정했습니다. 그런데 그 초반을 배우들의 연기력이 커버한다는 게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유해진이 촌장 어몽도로 등장하는 순간부터 영화의 공기가 달라지는 걸 느꼈습니다. 어몽도라는 가상의 인물이 역사적 사건들 사이에서 얼마나 자연스럽게 녹아드는지가 이 영화의 핵심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저는 생각지도 못하게 영화 중간에 배가 고파졌습니다. 흰쌀밥, 생선구이, 다슬기 삼계탕이 화면에 등장하는 장면에서요. 다슬기 삼계탕이란 민물 다슬기를 넣어 끓인 삼계탕으로, 강원도 영월 지역의 전통 음식입니다. 영화 속 한식 묘사가 이렇게 공을 들인 이유는 아마도 영월이라는 공간의 질감 자체를 화면에 담으려 했기 때문일 겁니다.
호랑이 CG가 눈에 띄게 티가 난다는 건 분명한 단점입니다. 또 역사적 사실과 영화적 상상이 함께 섞여 있기 때문에, 실제 역사와 어디까지가 각색인지 궁금한 관객이라면 조금 구분해서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다만 제작비 규모를 고려하면 이 부분은 충분히 감안하고 볼 수 있는 수준입니다. 물론 완성도가 완벽한 작품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몇 가지 아쉬움보다 배우들의 연기와 역사적 해석이 주는 몰입감이 훨씬 크게 남았습니다.
역사 사극을 좋아하거나 계유정난과 단종의 이야기를 조금 더 입체적으로 만나보고 싶은 분이라면 한 번쯤 추천하고 싶은 작품입니다. 저는 이 영화를 보고 나서 단종의 비극보다도, 이미 기울어진 판 안에서 각자가 어떤 선택을 해야 했는지를 더 오래 생각하게 됐습니다. 역사는 이미 결말이 정해져 있지만, 영화는 그 결말보다 그 과정 속 사람들의 마음을 차분하게 들여다봅니다. 화려한 전투보다 인물들의 선택과 권력의 본질을 곱씹게 만드는 사극을 좋아한다면 충분히 만족할 만한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역사적 사실만 나열하는 사극보다, 역사 속 인물들의 감정과 선택을 함께 따라가 보고 싶은 분이라면 더욱 만족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