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준의 엄마는 끝내 이름이 없습니다. 영화 마더를 다 보고 나서야 저는 이 사실을 제대로 의식하게 됐고, 그 뒤로 한동안 멍해졌습니다. 그냥 강한 모성의 인물이 아니라, 너무 오래 ‘누군가의 엄마’로만 살아서 자기 이름이 닳아버린 사람처럼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면 현실에서도 이런 장면은 낯설지 않습니다. 누구의 엄마, 누구 아내, 누구 딸이라는 말은 많은데, 정작 그 사람 자체의 이름은 자꾸 뒤로 밀릴 때가 있으니까요. 그래서인지 영화 속 엄마를 보면서 저는 단순히 아들을 지키는 사람보다, 너무 오래 한 역할 안에서만 살아온 사람을 먼저 보게 됐습니다.
엄마를 의심하지 못했던 이유
저는 영화를 보면서 도준의 엄마가 틀렸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꽤 늦게까지 하지 못했습니다. 이상하다는 신호는 분명히 있었는데도, 엄마가 아들을 붙잡고 ‘우리 도준이는 그럴 애가 아니다’라고 밀어붙일 때 이상하게 그 감정을 따라가게 됐습니다. 돌이켜보면 저도 가까운 사람에 대해서는 비슷했던 것 같습니다. 이미 어딘가 잘못됐다는 걸 느끼면서도, 상대가 보내는 신호보다 내가 그 사람을 믿어온 시간이 더 오래 버티곤 했습니다. 그 사람이 한 행동보다 ‘원래 저럴 사람이 아닌데’라는 생각을 먼저 붙잡고 있었고, 이미 몇 번은 이상하다고 느꼈으면서도 그 사실을 바로 인정하지 못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내가 잘못 본 건 아닐까, 내가 너무 예민한 건 아닐까, 조금만 더 기다리면 괜찮아지지 않을까 같은 생각으로 시간을 끌었던 적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영화가 더 무서웠습니다. 범인을 쫓는 이야기처럼 보이는데도, 정작 관객을 끌고 가는 힘은 추리보다 믿음에 가까웠기 때문입니다. 초반의 몇몇 장면은 그래서 더 묘하게 남았습니다. 저는 특히 엄마와 도준 사이의 거리가 너무 가까워서 오히려 불편하다는 느낌을 여러 번 받았습니다. 서로를 돌본다기보다, 너무 오래 엉켜 있어서 이제는 어디까지가 보호이고 어디부터가 침범인지 구분이 안 되는 관계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가까워서 편안한 관계가 아니라, 너무 오래 서로에게 기대온 탓에 경계가 흐려진 관계 같았다고 해야 할까요. 현실에서도 그런 관계를 본 적이 있습니다. 서로를 위한다는 말은 분명 틀리지 않는데, 막상 그 안에 들어가 보면 누구 하나는 숨이 막히고 누구 하나는 놓는 법을 모르는 관계들 말입니다. 겉으로 보기엔 애틋해 보이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서로가 서로의 불안을 대신 붙잡고 있는 것 같은 관계요. 마더 속 엄마와 도준을 보면서 저는 바로 그 종류의 답답함을 떠올렸습니다. 사랑이 없는 관계라서 불편한 게 아니라, 사랑 말고는 설명할 수 있는 말이 남아 있지 않은 관계처럼 보여서 더 불편했습니다. 저는 가까운 사람일수록 쉽게 의심하지 못하는 편이었습니다. 한 번 좋게 본 사람은 다시 다르게 보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고, 관계가 흔들리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걸 바로 인정하지 못한 적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엄마를 보면서 무섭다는 감정보다 먼저 익숙하다는 감정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누군가를 믿고 싶을 때 사람은 생각보다 많은 걸 못 본 척하게 됩니다. 아니, 정확히는 못 본 척한다기보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방식으로만 보게 되는 것 같습니다. 마더는 그걸 아주 불편할 정도로 잘 보여주는 영화였습니다. 엄마의 시선이 지나가는 자리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 순간부터는 진실이 아니라 믿고 싶은 마음이 사건을 끌고 간다는 걸 알게 됩니다. 그런데도 그 감정에서 쉽게 빠져나오지 못하게 되죠. 저는 그게 이 영화가 무서운 이유라고 생각했습니다. 범인을 찾는 이야기보다, 가까운 사람을 믿고 싶은 마음이 사람을 어디까지 끌고 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쪽이 훨씬 더 서늘했기 때문입니다.
엄마라는 말 뒤에 숨는 마음
이 영화를 보고 나서 제가 오래 붙잡고 있었던 질문은 ‘엄마는 왜 저렇게까지 아들을 믿으려 했을까’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사람은 왜 받아들이기 싫은 현실 앞에서 이렇게까지 믿고 싶은 쪽으로 기울게 될까’에 가까웠습니다. 저는 누군가를 이해한다고 믿으면서 사실은 받아들이기 싫은 현실을 미루고 있었던 적이 있습니다. 가까운 사람에 대한 판단이 이상할 만큼 느렸던 시기였는데, 그때의 저는 상대를 있는 그대로 본 게 아니라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방식으로만 보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미 서운한 일이 몇 번 있었는데도 ‘요즘 힘든 일이 있나 보다’, ‘이번만 그런 거겠지’ 같은 말로 상황을 덮었고, 상대가 분명히 보여준 신호보다 내가 그 사람을 믿고 싶은 마음을 더 오래 붙잡고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건 이해라기보다 유예에 가까웠습니다. 실망하고 싶지 않아서, 관계가 틀어졌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조금만 더 미루면 덜 아플 것 같아서 시간을 끌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엄마가 아들의 결백을 그렇게까지 확신하는 모습이 낯설지 않았습니다. 그 믿음이 정말 사랑이라서인지, 아니면 받아들이기 싫은 현실을 밀어내는 방식인지 저도 쉽게 구분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가까운 사람을 끝까지 감싸고 싶은 마음은 분명 애정에서 시작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감정이 어느 순간부터는 상대를 위한 것인지, 아니면 내가 버티기 위해 붙드는 것인지 헷갈려질 때가 있습니다. 저는 마더가 바로 그 지점을 건드린다고 느꼈습니다. 엄마가 한 행동 하나하나를 따져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저한테 더 무서웠던 건 그 모든 선택이 결국 ‘엄마니까’라는 말 안에 어느 정도 감춰질 수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아들의 잘못을 끝까지 부정하는 일도, 다른 곳에서 답을 찾으려는 일도, 심지어 선을 넘어버린 행동들까지도 모성이라는 이름 아래에서는 너무 쉽게 비극으로만 읽히곤 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 영화가 불편했습니다. 잘못을 저질렀다는 사실보다, 그 잘못이 사랑의 언어로 포장될 수 있다는 게 더 무서웠기 때문입니다. 예전의 저는 가까운 사람을 이해하는 게 성숙한 일이라고 믿었습니다. 섣불리 판단하지 않는 사람, 끝까지 이유를 들어보는 사람, 쉽게 등을 돌리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그런 태도 자체가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시간이 지나고 보니, 모든 걸 이해하려는 태도가 언제나 좋은 방향으로만 흘러가지는 않는다는 것도 알게 됐습니다. 때로는 이해하려는 마음이 내 감정을 뒤로 미루는 방식이 되기도 하고, 이미 상처받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기 위한 핑계가 되기도 했습니다. 마더 속 엄마를 보면서 제가 떠올린 것도 바로 그 지점이었습니다. 누군가를 끝까지 믿는다는 게 꼭 따뜻한 일만은 아니라는 것, 사랑이 깊을수록 오히려 현실을 바로 보기 어려워질 때가 있다는 것 말입니다. 저는 이 영화를 보고 나서야, 가까운 사람을 감싸는 일과 가까운 사람의 진실을 외면하는 일이 생각보다 가까운 자리에 있을 수 있다는 걸 조금 더 선명하게 보게 됐습니다.
잊으려는 사람의 몸짓
이 영화에서 자꾸 눈에 밟혔던 건 엄마의 침이었습니다. 처음에는 그저 직업과 연결된 소품처럼 보였는데, 뒤로 갈수록 그건 엄마가 감당하기 힘든 감정을 자기 식으로 눌러버리는 방식처럼 느껴졌습니다. 저는 원래 누군가가 너무 큰 충격이나 죄책감 앞에서 보이는 몸의 반응을 오래 기억하는 편입니다. 울음을 참느라 손톱을 손바닥에 세게 박는다거나, 아무 일도 아닌 척하면서 괜히 손가락을 만지작거린다거나, 아픈 곳도 아닌데 자꾸 어깨를 주무르는 사람들을 보면 그 안에 말로 설명되지 않는 긴장이 들어 있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엄마가 침을 놓는 장면도 단순한 버릇이나 직업적 몸짓처럼 보이지 않았습니다. 너무 괴로운데 울거나 무너질 수는 없어서, 차라리 다른 감각으로 그 고통을 덮어버리는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감정을 처리한다기보다, 감정이 몸 밖으로 새어 나오지 못하게 억지로 눌러 담는 방식에 더 가까워 보였다고 해야 할까요. 도준이 과거의 기억을 꺼내는 장면에서 엄마가 허벅지에 침을 찌르는 순간도 그래서 오래 남았습니다. 그 장면을 보면서 저는 죄책감을 풀어내는 사람이라기보다,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감정을 몸으로 눌러버리는 사람을 보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너무 큰 충격 앞에서 사람은 가끔 설명보다 행동이 먼저 나올 때가 있습니다. 울어야 할 것 같은데 눈물이 안 나고, 화를 내야 할 것 같은데 오히려 멍해지고, 도망치고 싶은데 몸이 굳어버리는 식으로요. 엄마의 침도 저한테는 그런 반응처럼 보였습니다. 감정이 너무 커서 말로는 다룰 수 없으니, 차라리 더 선명한 통증으로 덮어버리는 것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저는 그 장면을 보면서 한때 제 감정을 제대로 들여다보지 못하고 바쁘게 움직이거나, 다른 생각으로 억지로 덮어버리던 때가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문제를 해결한 건 아니었는데, 당장 무너지지 않기 위해 다른 감각에 매달렸던 순간들이 누구에게나 조금씩은 있지 않나 싶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버스 장면도 저한테는 해방보다 마비에 가까웠습니다. 흔히 춤추는 장면은 어떤 해방감처럼 읽히기 쉬운데, 저는 그 장면을 보면서 오히려 더 서늘해졌습니다. 잊은 게 아니라, 잊은 척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상태처럼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다 털어낸 사람의 몸짓이라기보다, 도저히 다 안고 갈 수 없어서 스스로 일부를 잘라내듯 버티는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영화가 끝나갈수록 둘의 관계가 조용히 뒤집히는 것도 오래 남았습니다. 처음에는 엄마가 도준을 돌보는 사람처럼 보이는데, 뒤로 갈수록 오히려 도준이 엄마를 감당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 변화가 대사보다 행동으로 드러난다는 점이 더 서늘했습니다. 무너진 건 사건만이 아니라, 둘 사이의 역할 자체였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마더는 저한테 단순히 충격적인 결말을 가진 영화가 아니라, 감당할 수 없는 감정이 사람의 몸과 관계를 어떤 식으로 바꿔놓는지를 끝까지 따라가게 만드는 영화로 남았습니다.
가까운 사람을 믿는다는 것
마더는 재미있는 영화라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렇다고 불편하기만 한 영화라고 정리하기도 애매합니다. 저한테는 누군가를 믿는다는 것이 어떤 형태로 변할 수 있는지, 그리고 그 마음이 어느 순간부터 상대를 위한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한 것이 되는지를 오래 생각하게 한 영화로 남았습니다. 예전의 저는 가까운 사람을 이해하는 게 성숙한 일이라고 믿었습니다. 섣불리 단정하지 않는 사람, 쉽게 등을 돌리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 마음이 언제 현실을 외면하는 방식으로 바뀌는지도 함께 보게 됐습니다. 실망하고 싶지 않아서, 내가 믿어온 시간이 허무해질까 봐서, 혹은 관계가 끝났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어서 사람은 생각보다 오래 진실을 미루기도 합니다. 저는 마더를 보면서 그 사실을 다시 떠올렸습니다. 엄마가 무섭다기보다, 누군가를 믿고 싶은 마음이 사람을 어디까지 끌고 갈 수 있는지가 더 무서웠습니다. 그래서 이 영화는 저한테 단순히 모성애를 다룬 작품으로 남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관계 안에서 제가 얼마나 자주 진실보다 마음을 먼저 붙잡았는지를 돌아보게 한 영화에 더 가까웠습니다. 누군가를 오래 감쌌던 경험이 있거나, 관계 안에서 선을 긋는 일을 유독 힘들어해본 사람이라면 이 영화를 보고 저와 비슷한 불편함을 느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보고 나서도 자꾸 엄마의 선택보다 내 쪽의 관계를 떠올리게 된다면, 아마 이 영화가 건드린 건 단순한 줄거리 이상의 무언가일 겁니다. 저한테 마더는 바로 그런 영화였습니다. 보고 나면 영화 속 엄마보다도, 내가 누군가를 믿어왔던 방식과 그 믿음이 나를 어디까지 끌고 갔는지를 더 오래 돌아보게 만드는 영화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