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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가 의미 있으려면 새로운 일이 있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여행을 가거나, 맛집을 찾거나, 특별한 계획이 있어야 좋은 하루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퍼펙트 데이즈는 그 믿음을 조용히 뒤집었습니다.
일상의 아름다움 — 반복이 지루함이 아닌 이유
솔직히 처음에는 예상 밖이었습니다. 주인공이 아침에 일어나 빗자루 소리를 들으며 하루를 시작하고, 캔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카세트테이프를 틀고 차를 몰아 출근하는 장면이 반복됩니다. 드라마틱한 사건도, 반전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장면들이 자꾸 마음에 걸렸습니다.
영화에서 히라야마는 루틴(routine)을 삶의 중심에 놓고 삽니다. 여기서 루틴이란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자기만의 리듬으로 하루를 설계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저도 그 장면을 보면서 떠오른 날이 있었습니다. 외출 중에 휴대폰을 집에 두고 왔다는 걸 뒤늦게 알아챈 날이었습니다. 처음 몇 시간은 불안했고, 주머니에 손이 계속 갔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자 창밖으로 흔들리는 나무가 보이고, 거리의 소음이 들렸습니다. 평소 같았으면 화면만 보고 지나쳤을 순간들이었습니다. 평소에는 버스를 기다리면 무조건 휴대폰부터 꺼냈습니다. 그런데 그날은 할 일이 없었습니다. 사람들을 바라보고, 바람소리를 듣고,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봤습니다. 별것 아닌 시간이었는데 이상하게 마음이 조금 편안해졌습니다. 영화를 보면서 그때의 감각이 자연스럽게 떠올랐습니다.
히라야마의 루틴도 그와 비슷해 보였습니다. 디지털 디톡스(digital detox)처럼, 즉 과도한 디지털 자극을 의도적으로 끊어내고 현실의 감각을 되살리는 방식처럼, 그는 스마트폰도 SNS도 없는 삶 속에서 오히려 더 선명하게 하루를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4조 반 다다미방에서 문고판 책을 읽다 잠드는 그의 밤은 초라해 보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꽉 찬 느낌이었습니다.
히라야마는 같은 길을 걷고 같은 일을 하지만, 같은 하루를 반복하지는 않습니다. 출근길에 올려다보는 나무도, 점심시간에 비치는 햇살도 조금씩 달라집니다. 영화는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도 매일 다른 풍경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천천히 보여줍니다. 그래서 그의 루틴은 지루한 반복이 아니라 작은 변화를 발견하는 시간이 됩니다.
특히 인상 깊었던 건 히라야마가 매일 같은 나무를 사진으로 기록하는 장면이었습니다. 같은 장소를 찍지만 계절과 빛, 바람에 따라 나무는 매번 다른 모습을 보여줍니다. 영화는 반복되는 일상도 무엇을 바라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하루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긴 설명 대신 이 장면 하나로 보여줍니다.
- 아침마다 같은 시간에 일어나 같은 순서로 하루를 시작하는 히라야마의 루틴
- 캔커피·카세트 테이프처럼 감각을 자극하는 아날로그 오브제의 반복
- 퇴근 후 책 한 권으로 마무리되는 소박하지만 완결된 하루
퍼펙트 데이즈가 말하는 미니멀 라이프
영화를 보면서 제가 계속 물음표를 달았던 지점이 있습니다. 히라야마는 도쿄에서 혼자 살고, 가족도 없고, 4조 반짜리 방에서 지냅니다. 객관적인 조건만 보면 누군가는 "저게 무슨 삶이야"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화면 속 그는 어딘가 평온합니다. 그리고 그 평온함이 공허하지 않고 진짜처럼 느껴진다는 게 이 영화의 이상한 힘이었습니다.
미니멀리즘(minimalism)이라는 개념이 여기서 중요합니다. 미니멀리즘이란 불필요한 것들을 제거하고 정말 필요한 것에 집중하는 삶의 방식을 말합니다. "필요 없는 것을 버리는 삶이 아니라, 필요한 것을 분명히 아는 삶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히라야마는 이 개념을 말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는 물건을 거의 사지 않지만, 자신이 좋아하는 것만은 오래 간직합니다. 오래된 카세트테이프를 반복해서 듣고, 문고판 책을 읽으며, 일회용이 아닌 필름 카메라로 사진을 남깁니다. 적게 소비하지만 깊게 즐기는 삶이라는 점에서 미니멀리즘이 단순한 절약이 아니라 삶의 태도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중요한 건 물건의 개수가 아니라 무엇을 남길지 선택하는 태도였습니다. 히라야마는 유행을 좇기보다 오래 곁에 둘 수 있는 것들을 선택합니다. 영화는 적게 가지는 삶보다,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분명히 아는 삶이 더 중요하다고 말하는 듯했습니다.
제 경험상 이건 좀 다르게 다가왔습니다. 한동안은 필요한 것보다 갖고 싶은 것을 더 많이 샀던 시기도 있었습니다. 새 물건을 사면 기분은 잠시 좋아졌지만 오래가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방 안이 복잡해질수록 마음도 함께 복잡해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알림과 콘텐츠를 쫓느라 정작 하루가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기억나지 않는 날이 많았습니다. 히라야마를 보면서 물건을 줄이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무엇을 오래 곁에 둘지 아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이후부터는 새로운 물건을 사기 전에 '정말 오래 사용할 물건인가'를 한 번 더 생각하게 됐습니다. 그래서 그의 삶은 '덜 가진 사람'이 아니라 '잘 선택하며 사는 사람'처럼 느껴졌습니다.
영화는 출처: 빔 벤더스 공식 사이트에서도 소개하듯, 빔 벤더스 감독이 도쿄 시부야구의 공중화장실 리뉴얼 프로젝트인 '더 도쿄 토일렛(The Tokyo Toilet)'을 계기로 기획한 작품입니다. 원래는 단편 다큐멘터리로 출발했지만, 촬영 현장에서 장편 극영화로 재구성됐습니다. 도쿄 시내에서 17일간 촬영한 이 작품은 그 짧은 시간 안에 히라야마라는 인물을 완성시켰습니다. 그 밀도가 화면에서 그대로 느껴집니다.
빔 벤더스 감독의 시선 — 냉소 없이 일상을 바라본다는 것
영화를 보고 나서 제가 가장 오래 생각한 건 이 질문이었습니다. '잘 사는 삶'과 '잘 바라보는 삶' 중에 무엇이 더 중요한가. 이 영화는 그 질문에 직접 답하지 않습니다. 대신 히라야마의 하루를 가만히 지켜보게 만들면서, 관객 스스로 그 질문을 품게 합니다. 저도 제가 직접 그 질문 앞에 놓인 것 같아서 적잖이 당혹스러웠습니다.
빔 벤더스 감독은 '로드 무비(road movie)의 거장'으로 불립니다. 로드 무비란 주인공이 이동과 여정을 통해 자신을 발견하는 영화 장르를 말합니다. 그런데 퍼펙트 데이즈에서는 히라야마가 어디론가 '떠나지' 않습니다. 매일 같은 길을 같은 차로 달립니다. 이 역설이 흥미로웠습니다. 외부의 이동 없이도 내면의 여정이 가능하다는 걸, 감독은 히라야마의 눈빛과 느린 호흡으로 보여줍니다.
빔 벤더스 감독은 오래전부터 평범한 공간과 사람을 특별하게 담아내는 연출로 유명했습니다. 영화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보다 '그 사람이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는가'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합니다. 그래서 퍼펙트 데이즈 역시 이야기를 빠르게 끌고 가기보다 한 사람을 오래 지켜보게 만드는 방식을 선택합니다. 화장실 청소라는 직업보다 그 일을 대하는 히라야마의 태도가 더 중요하게 그려지고, 관객 역시 어느 순간 그의 시선을 따라 나무와 햇살, 그리고 평범한 하루를 새롭게 바라보게 됩니다.
극적 구성 요소(dramatic arc)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이는 이야기가 갈등·고조·해소의 흐름을 거치며 관객의 감정을 이끄는 구조를 말합니다. 대부분의 상업 영화는 이 구조에 철저합니다. 그런데 이 영화는 그 구조를 거의 쓰지 않습니다. 극적인 전개를 기대하는 관객이라면 다소 느리게 느껴질 수 있다는 건 저도 솔직히 인정합니다. 실제로 영화 초반에는 '이게 어디로 가는 거지?' 싶은 순간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느림이 이 영화의 무기라는 걸 알게 됩니다. 자극적인 사건 없이도 한 인물을 끝까지 바라보게 만드는 힘, 그게 빔 벤더스가 이 작품으로 증명한 것이라고 봅니다. 이 영화가 끝까지 설득력을 잃지 않는 이유는 히라야마를 연기한 야쿠쇼 코지의 힘도 큽니다. 그는 긴 대사보다 표정과 눈빛으로 감정을 전달합니다. 크게 울거나 화내지 않는데도 인물의 외로움과 평온함이 동시에 느껴집니다. 그래서 관객은 히라야마를 이해하기보다, 어느새 그의 하루를 함께 살아본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합니다.
저는 특히 마지막 엔딩이 오래 남았습니다. 웃는 것 같기도 하고, 우는 것 같기도 한 히라야마의 표정 하나만으로 그가 지나온 삶과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하루를 모두 보여줬다고 느꼈습니다. 긴 설명 없이도 감정을 전달하는 힘이 이 영화의 가장 큰 장점이었습니다.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도 히라야마를 연기한 야쿠쇼 코지가 남우주연상을 수상하며 작품성과 연기력을 함께 인정받았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퍼펙트 데이즈, 지루하지 않나요?
A. 제가 직접 봤을 때 초반 30분은 솔직히 '이게 맞나?' 싶었습니다. 사건이 거의 없고 히라야마의 일상이 그대로 반복되니까요. 그런데 중반을 넘어서면서 그 반복 안에서 작은 변화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극적 구성 요소 없이도 몰입이 된다면, 그게 이 영화의 성공입니다.
Q. 퍼펙트 데이즈는 어떤 사람에게 잘 맞는 영화인가요?
A. 바쁘게 살아가다가 문득 '내가 제대로 살고 있나?' 싶어진 분들에게 특히 잘 맞는다고 봅니다. 화려한 스토리보다 조용한 여운을 좋아하거나, 미니멀 라이프에 관심이 생긴 분이라면 더 깊이 공감할 수 있는 작품입니다.
Q. 더 도쿄 토일렛 프로젝트가 뭔가요?
A. 도쿄 시부야구에서 진행한 공중화장실 리뉴얼 프로젝트입니다. 세계적인 건축가·디자이너들이 참여해 공공화장실을 예술 공간으로 재탄생시켰고, 이 프로젝트가 "퍼펙트 데이즈" 기획의 출발점이 됐습니다. 영화 속 히라야마가 청소하는 화장실들이 실제 그 프로젝트의 결과물입니다.
Q. 빔 벤더스 감독 작품 처음 보는데 이 영화부터 봐도 되나요?
A. 충분합니다. "퍼펙트 데이즈"는 감독의 전작을 몰라도 바로 진입할 수 있는 영화입니다. 오히려 이 작품을 먼저 보고 빔 벤더스의 다른 로드 무비들로 넘어가는 순서가 자연스럽다고 느꼈습니다.
결론
큰 사건 하나 없이도 두 시간이 금방 지나가는 영화는 흔하지 않습니다. 퍼펙트 데이즈는 평범한 하루를 이렇게까지 깊게 바라볼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 작품이었습니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휴대폰이 없어서 하루가 망한 게 아니라, 그동안 너무 많은 시간을 작은 화면 안에서만 보낸 건 아닐까, 퍼펙트 데이즈는 저에게 그 질문을 더 크게, 더 오래 품게 만들었습니다.
그 이후로는 예전보다 일부러 휴대폰을 내려놓는 시간을 만들어 보려고 했습니다. 산책을 할 때는 이어폰을 빼고 주변을 둘러보기도 하고, 창밖의 풍경을 가만히 바라보는 시간이 조금씩 늘었습니다. 거창한 변화는 아니었지만, 아무 의미 없다고 생각했던 일상이 생각보다 많은 것들을 품고 있었다는 사실을 조금씩 알게 됐습니다.
이 영화는 "이렇게 살아야 한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히라야마의 루틴을 따라가며 스스로 그 질문을 하게 만드는 방식입니다. 냉소를 걷어낸 시선으로 평범한 하루를 바라보는 경험은 생각보다 오래 남았습니다.
영화를 본 뒤 세상이 달라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같은 하루를 바라보는 제 시선이 조금 달라졌습니다. 퍼펙트 데이즈는 특별한 하루를 기다리는 대신, 지금의 하루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 묻게 만드는 영화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