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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이 편안하다고 느끼는 건 '가족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정전이 되고 나서 그 생각이 흔들렸습니다. 어두워진 거실에 혼자 앉아 있으면서, 집을 집답게 만드는 건 사람이 아니라 아무도 의식하지 않는 수백 가지 편리함일 수 있다는 걸 처음으로 실감했습니다. 영화 《우리집》은 그 감각을 다시 건드렸습니다. 정전이 무서웠던 건 어둠 자체보다 평소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던 소리들이 갑자기 사라졌다는 것이었습니다. 냉장고가 돌아가는 소리도, 공기청정기 소리도, 충전 중이라는 작은 알림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평소에는 시끄럽다고 생각했던 집의 소리들이 사실은 제가 집에 혼자 있다는 사실을 덜 느끼게 해주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날 처음으로 집의 편안함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있다는 신호'까지 포함되어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정전 경험이 흔든 '집은 편안한 곳'이라는 믿음
일반적으로 집은 무조건 편안한 공간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제 경험상 그 편안함은 조건부입니다.
어느 날 혼자 집에 있다가 갑자기 전기가 나갔습니다. 처음에는 잠깐 깜빡인 줄 알았는데 냉장고 소리가 멎고 집 안이 완전히 조용해지자 상황이 달리 느껴졌습니다. 손전등용으로 휴대폰을 켜고 두꺼비집, 즉 분전반(Distribution Board)을 찾아 열었습니다. 분전반이란 건물 내 각 회로로 전기를 나눠 공급하는 제어 장치인데, 막상 열어 보니 어느 차단기를 손봐야 하는지 전혀 알 수 없었습니다. 잘못 건드리면 더 큰 문제가 생길까 봐 손을 떼고 그냥 서 있었습니다.
그때 이상하게 집이 낯설게 보였습니다. 매일 지나치던 복도, 익숙한 주방 배치인데도 어둠 속에서는 전혀 다른 공간 같았습니다. 평소에는 편안함의 근거가 무엇인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그게 사라지고 나서야 존재 자체를 인식하게 됐습니다. 평소에는 너무 당연하게 의식하지 않던 것들이 사라졌을 때 비로소 그 가치를 알아차리는 경험이었습니다. 저는 그날 집이 편안한 공간이라는 사실도 결국 여러 조건이 계속 유지될 때 가능한 상태라는 걸 알게 됐습니다.
- 불을 켜는 행위, 냉장고를 여는 행위, 휴대폰을 충전하는 행위
- 이 모든 것이 전기라는 단일 인프라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
- 한 가지가 끊기는 순간 '집의 편안함' 전체가 함께 흔들린다는 것
집과 가족은 같은 말이 아니다
영화 《우리집》에는 서로의 집에서 하룻밤을 묵고 싶어 하는 아이들이 나옵니다. 다른 집이 더 넓어 보이고, 더 자유로워 보입니다. 그런데 막상 서로의 집에 가 보면 각자의 공간에는 저마다의 제약이 있습니다. 좁은 공간,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규칙들. 아이들은 그것을 보면서도 그냥 같이 있고 싶어 합니다.
저는 이 장면을 보면서 가족 관계에서의 심리적 안전감(Psychological Safety)이라는 개념이 떠올랐습니다. 심리적 안전감이란 어떤 집단 안에서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을 드러내도 비난받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을 뜻합니다. 조직심리학자 에이미 에드먼슨(Amy Edmondson)이 팀 퍼포먼스 연구에서 핵심 변수로 제시한 개념인데(출처: 하버드 경영대학원 에이미 에드먼슨 교수 프로필), 가족 사이에서도 이 안전감이 없으면 같은 공간에 있어도 편안하지 않습니다.
저도 가족과 지내면서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크게 싸운 것도 아니고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려고 한 것도 아닌데, 그냥 서로 피곤하다는 이유로 말을 줄이고 넘어간 적이 있습니다. 그때는 별일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고 보니 같은 집에 있으면서도 서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는 상태가 되어 있었습니다. 밥을 먹었는지, 오늘 하루는 어땠는지 정도의 말만 오갈 뿐이었습니다. 집은 그대로였는데 이상하게 편하지 않았습니다.
일반적으로 '가족이니까 다 이해해 줄 것'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제 경험상 가까운 사이일수록 오히려 말하지 않고 넘어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상대가 당연히 알아줄 거라는 전제가 쌓이면서 오해가 자라납니다. 영화 속 아이들이 어른들의 문제 사이에서 혼자 감당하는 장면이 마음이 무거웠던 것도 그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아이들이 담담하게 버티는 모습은 보기에 따라 씩씩해 보일 수 있지만, 저는 거기서 오히려 말을 못 하는 상황을 읽었습니다.
저는 이 영화가 아이들을 '어른보다 순수한 존재'로만 그리지 않았다는 점도 좋았습니다. 아이들은 어른들의 문제를 모두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분위기는 누구보다 빨리 감지합니다. 누가 화가 났는지, 지금 말을 걸어도 되는지, 집안 분위기가 이상한지를 어른에게 설명받지 않아도 알아차립니다. 그래서 영화 속 아이들의 침묵은 단순히 어린아이답게 말을 아끼는 모습이 아니라, 어른들의 관계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익힌 눈치처럼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저는 이 부분이 오히려 영화가 가족을 바라보는 방식에서 가장 현실적인 지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전기가 끊기자 보이기 시작한 것들
정전이 됐을 때 냉장고 문을 열었다가 내부 조명이 켜지지 않는 걸 보고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났습니다. 냉장고 안이 보이지 않아 휴대폰 손전등을 비춰야 했는데, 그 순간이 굉장히 크게 느껴졌습니다. 별것 아닌 전구 하나가 하는 역할을 그날 처음 실감했습니다.
정전은 생각보다 흔하게 발생할 수 있지만, 실제로 혼자 겪어보니 숫자로 보는 것과 체감하는 것은 꽤 달랐습니다. 특히 전기가 끊겼을 때는 무작정 차단기를 만지기보다 먼저 주변 건물이나 복도에서 전기가 들어오는지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집 전체의 문제인지 건물 전체의 문제인지에 따라 대응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당시 아무것도 모르고 휴대폰 손전등 하나만 들고 분전반 앞에 서 있었는데, 지금이라면 먼저 관리실이나 전력 관계 안내를 확인했을 것 같습니다.
특히 휴대폰 배터리가 줄어드는 숫자를 보면서 불안했던 기억이 납니다. 평소 같으면 바로 충전기를 꽂으면 그만이었는데, 전기가 없으니 충전 자체가 불가능했습니다. 전기가 끊기자 하나의 불편함만 생긴 것이 아니었습니다. 불이 꺼지고, 냉장고를 제대로 확인하기 어려워지고, 휴대폰을 충전할 수 없게 되고, 인터넷까지 불안정해졌습니다. 하나의 기능이 멈추자 그것을 이용하던 다른 기능들도 차례로 불편해졌습니다. 저는 이것을 '연쇄적인 의존'이라는 관점에서 생각해 봤습니다. 평소에는 각각 따로 존재하는 편리함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서로 연결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돌이켜보면 저는 집에서 사용하는 것들의 편리함을 거의 기억하지 않고 살았습니다. 스위치를 누르면 불이 켜지고, 냉장고 문을 열면 안이 보이고, 휴대폰 배터리가 부족하면 충전기를 꽂으면 됐습니다. 너무 당연해서 고마워할 이유조차 없었던 것들입니다. 그런데 정전이 되고 나니 평소에는 있는지도 모르고 사용했던 편리함들이 사실은 매일 저를 도와주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람 사이의 관계도 비슷하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늘 곁에 있는 사람의 배려는 너무 익숙해서 잘 보이지 않다가, 어느 순간 사라지고 나서야 그 빈자리가 크게 느껴지는 것처럼요.
사람 사이의 관계도 비슷하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늘 곁에 있는 사람의 배려는 너무 익숙해서 잘 보이지 않다가, 어느 순간 사라지고 나서야 그 빈자리가 크게 느껴지는 것처럼요.
같이 살아간다는 것 — 영화가 남긴 질문
전기가 다시 들어왔을 때 집 안의 불이 한꺼번에 켜졌습니다. 저도 모르게 "다행이다"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무서운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몇 시간 불편했을 뿐인데, 그 말이 자연스럽게 나온 게 조금 신기했습니다.
《우리집》을 보면서 그날의 감각이 다시 떠올랐습니다. 영화는 집과 가족을 아름답게 포장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이 감당하기에 무거운 상황을 담담하게 보여주면서, 관객이 '누가 잘못한 것인가'를 판단하기 어렵게 만듭니다. 저는 그 불편함이 오히려 이 영화의 핵심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오히려 이 영화가 '가족은 결국 서로를 이해해야 한다'는 정답을 쉽게 내놓지 않는 점이 좋았습니다. 현실에서는 가족이라고 해서 모든 마음을 알 수 없고, 서로 사랑한다고 해서 갈등이 자동으로 해결되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이 아무리 가족을 붙잡으려고 해도 어른들의 문제까지 대신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영화 속 아이들의 행동이 귀엽게만 보이지 않았습니다. 함께 있고 싶다는 마음과, 어른들의 세계를 감당해야 하는 현실이 동시에 보였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가족 영화는 결국 화해하거나 이해에 도달하는 구조로 흐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이 영화는 그 결론을 쉽게 주지 않습니다. 제 경우엔 보고 나서 오히려 제가 가족에게 얼마나 말을 생략하고 살았는지가 먼저 떠올랐습니다. 상대가 알아서 이해해 줄 거라는 전제, 그 전제가 쌓이면 어느 순간 서로가 낯선 공간이 됩니다. 정전 이후 집이 잠깐 낯설어졌던 것처럼.
그래서 이 영화는 저에게 가족을 다르게 바라보게 한 영화라기보다, 같이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 소리 없이 물어보는 영화로 남았습니다.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해도 한 번 더 물어보는 것, 그 작은 차이가 집을 집답게 만드는 조건 중 하나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가족에게 필요한 것이 항상 대단한 대화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오늘 힘들었어?"라는 한마디를 먼저 건네거나, 평소보다 조용한 사람이 있으면 그냥 지나치지 않는 정도면 충분할 때도 있습니다. 예전에는 가까운 사람에게는 굳이 묻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오히려 가까운 사이일수록 한 번 더 물어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너무 잘 안다고 생각하는 순간부터 상대를 내 기준으로 짐작하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영화 《우리집》은 어떤 장르인가요?
A. 한국 독립영화로, 가족 해체와 아이들의 시선을 담은 드라마입니다. 일반적으로 독립영화는 상업영화에 비해 서사가 느리다고 알려져 있지만, 이 작품은 아이들의 행동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돼 체감 속도가 묵직하면서도 집중됩니다. 제 경우엔 보는 내내 불편하면서도 시선을 떼기 어려웠습니다.
Q. 정전 났을 때 두꺼비집(분전반)은 어떻게 확인해야 하나요?
A. 먼저 집 안 전체가 정전된 것인지, 건물이나 주변까지 정전된 것인지 확인하는 것이 좋습니다. 집 안의 차단기가 내려가 있다면 원인을 확인한 뒤 복구할 수 있지만, 차단기가 반복해서 내려가거나 타는 냄새, 연기, 스파크 등이 있다면 직접 만지지 않는 것이 안전합니다. 저처럼 갑작스러운 정전을 처음 겪었다면 휴대폰 손전등을 준비하고 관리실이나 전력 관련 안내를 확인하는 것도 현실적인 방법입니다.
Q. 이 영화는 어린이가 보기에도 괜찮은 영화인가?
A. 영화 속 내용은 부모의 갈등과 가정 불화를 담고 있어 어린 아이보다는 초등 고학년 이상이나 성인 관객에게 더 적합하다고 봅니다. 일반적으로 '가족 영화'라고 하면 온 가족이 함께 볼 수 있는 내용을 떠올리지만, 이 작품은 그 기대와 다른 방향으로 흐릅니다. 오히려 부모가 보고 나서 자신의 가족 관계를 돌아보게 되는 영화라는 느낌이었습니다.
Q. 심리적 안전감이 가족 관계에서도 중요한가요?
A. 조직심리학에서 출발한 개념이지만, 가족 내 의사소통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가까운 관계일수록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라는 전제가 생기기 쉬운데, 제 경험상 그 전제가 오해의 출발점이 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서로의 이야기를 한 번 더 묻는 작은 행동이 심리적 안전감을 만드는 현실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결론
집이 편안한 이유를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냥 집이니까 편한 줄 알았습니다. 정전이 되고, 냉장고 불이 꺼지고, 휴대폰 배터리가 줄어드는 걸 보면서 그 편안함이 얼마나 많은 것들 위에 올라앉아 있는지를 비로소 알게 됐습니다. 《우리집》은 그 감각을 가족이라는 관계로 확장해서 보여주는 영화였습니다.
영화를 보고 나면 아마 저처럼 '집이란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한 번쯤 하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예전에는 집을 사람과 공간의 문제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그 안에서 서로 얼마나 편하게 말할 수 있는지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가족이니까 괜찮겠지, 가까우니까 알겠지라는 전제를 한 번쯤 내려놓고 직접 물어보는 것. 그게 이 영화를 보고 나서 제가 실제로 해보려고 생각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