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등학교 때 친구 집에 놀러 갔다가 "우리 집에서 5분 거리에 성범죄자가 살고 있데"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고, 그 뒤로 친구한테 밤에 일찍 들어가라는 잔소리를 입에 달고 살았습니다. 영화 소원은 그때 느꼈던 막연한 공포를 훨씬 더 날카롭고 구체적인 방식으로 다시 끄집어냈습니다.
납치 성범죄, 그날의 기록
2013년 개봉한 영화 소원은 경상남도 창원에서 평범하게 살아가던 한 초등학생이 등굣길에 납치 및 성폭행을 당하는 사건을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이 영화가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는 사실이 더 무겁게 다가왔습니다.
범행의 결과는 단순한 신체적 상해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소원이는 수술을 받았고, 이후 영구적인 장애 가능성까지 언급될 만큼 심각한 부상을 입었습니다. 제가 직접 보면서 가장 충격을 받았던 장면은 아버지가 딸이 좋아하는 코코몽 인형 탈을 쓰고 병실에 나타나는 장면이었습니다. 한여름 더위에 땀에 흠뻑 젖은 채로 딸 앞에 서 있는 그 모습은 사건의 잔혹함보다 가족의 사랑을 먼저 떠올리게 했습니다. 아동 성폭력 피해(Child Sexual Abuse, CSA)란 18세 미만의 아동을 대상으로 가해지는 성적 학대 행위 전반을 의미하며, 신체적 손상뿐 아니라 장기적인 심리적 트라우마(trauma), 즉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로 이어지는 경우가 대다수입니다. 여기서 PTSD란 충격적인 사건을 경험한 이후 지속적인 공포, 악몽, 회피 행동 등이 반복되는 심리 장애를 가리킵니다.
국내 아동 성범죄 통계를 보면 이 사건이 결코 고립된 사례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경찰청 범죄통계에 따르면 아동 대상 성폭력 범죄는 매년 2,000건 이상 꾸준히 발생하고 있으며, 피해자의 상당수가 학교 등하굣길처럼 일상적인 공간에서 피해를 입습니다(출처: 경찰청). 범죄자와 불과 5분 거리에 살고 있다는 친구의 말이 갑자기 통계 수치로 다가오는 기분이었습니다.
피해자 회복, 왜 이게 중심이 되어야 하는가
영화 소원이 기존 성범죄 관련 영화들과 구별되는 지점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대부분의 영화가 범인 검거나 법정 공방에 무게를 두는 반면, 소원은 피해자의 심리 치료와 일상 복귀 과정에 초점을 맞춥니다.
소원이는 범인 체포 이후 심리 치료를 시작합니다. 심리 치료 과정에서 활용되는 대표적인 기법이 트라우마 중심 인지행동치료(TF-CBT, Trauma-Focused Cognitive Behavioral Therapy)입니다. TF-CBT란 아동 성폭력 피해자에게 특화된 치료법으로, 왜곡된 인지(생각)를 교정하고 감정을 안전하게 표현하는 능력을 키우는 데 목적을 둡니다. 이 치료가 효과를 발휘하려면 가족의 지지가 필수적이라는 점도 영화는 놓치지 않고 보여줍니다.
소원이가 다시 학교에 등교하는 장면은 영화에서 매우 중요한 전환점입니다. 친구들이 아무렇지 않은 듯 반겨주는 그 장면이, 어떤 거창한 위로보다 더 크게 와닿았습니다. 제 경험상 트라우마를 가진 사람에게 필요한 건 특별한 대우가 아니라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신호인 것 같습니다.
여성가족부가 발표한 성폭력 피해자 지원 현황에 따르면, 피해자 회복에 있어 가족 및 또래 집단의 정서적 지지가 전문 치료 못지않게 중요한 보호 요인으로 작용한다고 명시되어 있습니다(출처: 여성가족부). 영화가 그 사실을 데이터가 아닌 이야기로 증명해 보이고 있었던 셈입니다.
심신 미약 주장과 우리가 직면한 현실
재판 과정에서 범인은 심신 미약을 주장했습니다. 심신 미약이란 범행 당시 정신적 장애로 인해 사물을 변별하거나 의사를 결정하는 능력이 현저하게 저하된 상태를 의미하며, 형법 제10조 2항에 따라 형을 감경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됩니다.
솔직히 그 장면을 보면서 화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성인 여성을 대상으로 한 범죄도 용납하기 어려운데, 초등학생에게
그런 일을 저질러 놓고 심신 미약을 주장한다는 게 지금도 믿기지 않습니다.
피해자와 가족이 평생 감당해야 할 상처를 생각하면, 심신 미약 주장은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변명처럼 느껴졌습니다.
자신의 충동을 통제하지 못한 것을 정신적 문제로 포장하는 방식은, 피해자와 가족에게 두 번째 상처를 주는 행위입니다.
항소심에서 결국 유죄가 선고되었지만, 손해배상은 기각되었습니다.
재판 결과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1심 공판: 범인 특정 및 피해자 직접 지목으로 유죄 방향 확정
- 심신 미약 주장: 범인 측 정신감정 결과 제출, 법원은 받아들이지 않음
- 항소심 최종 판결: 유죄 선고, 손해배상 청구는 기각
손해배상 기각은 피해자 가족에게 또 다른 현실의 벽이었습니다.
범죄자 처벌과 피해자의 실질적인 회복이 반드시 같은 방향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했습니다.
영화 소원은 범인 처벌보다 피해자를 어떻게 보듬을 것인가를 묻는 작품입니다. 그래서 영화가 끝난 뒤에도 범인보다 가족들의 얼굴이 더 오래 기억에 남았습니다.
저도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는 성범죄 영화가 분노를 증폭시키는 방향으로만 흘러간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소원》은
그 사실을 가장 담담하고도 따뜻하게 보여주는 영화였습니다. 그래서 더 슬프고, 그래서 더 오래 기억에 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