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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엑시트>는 유독가스 테러라는 재난 상황을 소재로 하지만, 결국 평범한 사람이 위기 앞에서 어떻게 살아나는지를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영화 속에서는 도심 전체가 유독가스에 뒤덮이는 데 단 4분밖에 걸리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단순한 오락 영화라고 생각했는데, 보고 나니 한동안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재난 자체보다 위기 앞에서 사람들이 어떤 선택을 하는지가 더 오래 기억에 남았기 때문입니다.
영화 엑시트 속, 재난 앞에서 '준비된 사람'은 따로 있다
영화 《엑시트》의 주인공 용남은 취업에 계속 실패하는 청년입니다. 가족들에게 잔소리를 듣고, 어머니 칠순 잔치 자리에서도 어딘가 어색한 존재입니다. 그런데 어머니 잔치가 열린 구름 정원이라는 장소에서 갑자기 의문의 유독가스가 도심 전체를 뒤덮기 시작합니다. 사람들이 하나둘 쓰러지고, 가스는 빠르게 건물 안으로 스며듭니다.
이 장면에서 제가 떠올린 건 영화 속 상황만이 아니었습니다. 실제로 제가 근무하는 병원에서도 예상하지 못한 일을 겪은 적이 있습니다. 평소처럼 접수 업무를 보고 있는데 환자분 한 분이 갑자기 중심을 잃더니 그대로 뒤로 쓰러지셨습니다. 병원 안이었지만 그런 상황을 눈앞에서 직접 보는 건 처음이었습니다. '쿵' 하는 소리가 병원 안에 크게 울렸고, 고개를 돌려 보니 환자분은 바닥에 쓰러져 코피까지 흘리고 계셨습니다. 그 순간만큼은 정말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습니다. 빨리 움직여야 한다는 건 알겠는데 몸이 먼저 굳어버렸습니다. 아마 많은 사람이 예상하지 못한 위기를 마주하면 저처럼 몇 초 정도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을 것 같습니다. 다행히 곧바로 주변 직원들과 의료진이 달려와 환자분을 살폈고, 저도 정신을 추스르며 필요한 일을 도왔습니다. 상황이 정리되고 나서야 긴장이 풀렸는데, 퇴근한 뒤에도 그 '쿵' 소리와 쓰러지던 장면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습니다.
그런데 결국 그 순간을 수습한 건 '훈련된 반응'이었습니다. 비상 대응 매뉴얼(Emergency Response Protocol)이란 위기 상황에서 판단력이 마비되더라도 몸이 먼저 움직이게 해주는 절차를 말합니다. 병원에서는 이 매뉴얼이 있었기에 빠르게 처치로 이어질 수 있었고, 용남에게는 대학 시절 클라이밍 동아리에서 갈고닦은 신체 능력과 공간 판단력이 그 역할을 했습니다.
- 재난 발생 초기, 대부분의 사람은 상황 파악 자체를 늦게 한다
- 판단력이 흐려지는 순간에도 '익숙한 행동'은 살아남는다
- 용남의 클라이밍 경험이 옥상 탈출이라는 결정적 순간에 작동했다
클라이밍 기술이 생존 루트가 된 순간
옥상 문이 잠겨 있고, 방독면은 이미 누군가 가져간 상태. 가스는 점점 올라오고 있습니다. 용남이 선택한 건 외벽을 직접 타고 오르는 것이었습니다. 대학 시절 클라이밍 동아리의 에이스였던 실력이 이 순간 빛을 발합니다. 건물 외벽을 손과 발로 짚어가며 옥상에 오르는 장면은 단순한 액션이 아니라, 축적된 경험이 위기를 돌파하는 장면입니다.
클라이밍(Climbing)이란 암벽이나 인공 구조물의 표면을 손발로 붙잡고 오르는 스포츠입니다. 단순히 팔 힘만 좋다고 되는 게 아니라, 루트 파인딩(Route Finding), 즉 어떤 경로로 오를지 순간적으로 판단하는 능력이 핵심입니다. 용남이 외벽을 오를 수 있었던 것도 이 루트 파인딩 능력 덕분이었습니다.
나중에 건물 사이를 이동하는 장면에서는 로프를 활용한 하강 기술도 등장합니다. 하강 기술(Rappelling)이란 로프에 몸을 연결해 수직 구조물을 안전하게 내려오는 기법으로, 클라이밍의 기본기 중 하나입니다. 저는 클라이밍을 직접 해본 적은 없지만, 이 장면들을 보면서 '어떤 경험이든 그게 쌓이면 언젠가 내 몸을 지킨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실제로 행정안전부가 발표한 재난 대응 가이드라인에 따르면, 화학물질 누출 사고 발생 시 가장 먼저 해야 할 행동은 높은 곳으로의 이동입니다(출처: 행정안전부). 용남의 선택은 본능이 아니라, 결과적으로 정확한 재난 대응 행동이기도 했습니다.
탈출 전략, 결국 사람이 결정한다
헬기가 도착했고, 용남과 의주는 탈출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옆 건물 학원에 갇힌 학생들을 발견하는 순간, 두 사람은 자신들의 구조 기회를 내어줍니다. 논리적으로 보면 비합리적인 선택입니다. 하지만 이 장면이 오래 남는 이유는, 사람이 살아남으려는 본능보다 더 강한 무언가로 움직이는 순간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병원에서 환자분이 쓰러졌을 때 제일 먼저 한 행동도 결국 사람을 먼저 생각하는 것이었습니다. 침대를 끌고 와서 의료진을 부르는 일련의 행동이 다 끝나고 나서야 '아, 놀랐구나'라는 감각이 뒤늦게 밀려왔습니다. 위기의 순간에 사람은 의외로 이타적으로 움직입니다.
탈출 전략(Evacuation Strategy)이란 재난 상황에서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안전 구역으로 이동하는 절차와 경로를 사전에 설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영화 속 용남과 의주는 가스가 침식하지 않은 옥상을 찾아 이동하고, 드론이 가스를 일시적으로 걷어내는 틈을 이용해 건물 사이를 건넙니다. 즉흥처럼 보이지만, 매 순간 상황을 분석하고 최적의 경로를 선택하는 과정이 담겨 있습니다.
국민재난안전포털에 따르면, 실내 유독가스 사고 시 낮은 자세를 유지하고 최대한 높은 층으로 이동하는 것이 원칙입니다(출처: 국민재난안전포털). 영화는 오락적 허용 범위 안에서도 이 원칙을 꽤 충실하게 따르고 있었습니다.
- 유독가스 사고 시 낮은 자세 유지 후 고층으로 이동
- 방독면(정화통 포함)은 가능한 한 빨리 확보해야 하며, 정화통 수명을 반드시 확인
- 옥상 등 개방된 고지대에서 구조 신호를 보내는 것이 구조 가능성을 높인다
- 단독 행동보다 소규모 그룹 유지가 생존율을 높인다
영웅이 아닌 사람이 살아남는 이야기
《엑시트》가 끝나는 방식이 좀 독특합니다. 용남과 의주의 생존 여부를 명확하게 보여주지 않고 마무리합니다. 처음 봤을 때는 '왜 결말을 안 보여주지?'라고 생각했는데, 곱씹어보니 그게 오히려 현실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실제 재난에서는 해피엔딩이 보장되지 않습니다.
제가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 깊게 본 건 용남이라는 캐릭터의 구조입니다. 처음부터 능력 있는 영웅이 아니라, 취업도 안 되고 가족에게 구박받는 평범한 청년입니다. 그런데 그가 대학 시절 클라이밍 동아리에서 쌓은 경험이 실제 재난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자원이 됩니다. 저도 병원 접수 업무를 하면서 응급 상황을 몇 번 겪다 보니, 그 반복된 경험이 다음 번에는 덜 얼어붙게 해 준다는 걸 압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레질리언스(Resilience)라고 부릅니다. 레질리언스란 충격적인 상황에서도 회복하고 다시 기능할 수 있는 심리적 탄력성을 의미합니다. 용남이 계속된 취업 실패에도 무너지지 않고 버텨온 것, 그리고 위기의 순간에 끝까지 사람들을 돕는 것이 모두 이 레질리언스의 발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저 사람 참 쓸모없다고 생각했을 텐데'라는 마음이 들었다가, '그래서 저 사람이 살린 거잖아'라는 마음으로 바뀌었습니다. 지금 당장 빛나지 않는 경험이라도, 어느 순간엔 그게 누군가를 살리는 힘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이 영화는 꽤 설득력 있게 보여줍니다.
재난 영화를 볼 때마다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를 생각하게 됩니다. 《엑시트》는 그 질문을 가장 현실적인 방식으로 던진 영화였습니다. 화려한 특수효과보다, 취업 실패를 거듭하면서도 포기하지 않은 한 청년이 결국 자신의 경험으로 사람들을 살려내는 구조가 더 오래 남았습니다. 재난 대응이 낯선 분이라면, 이 영화 한 편이 생각보다 좋은 출발점이 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