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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미나리>는 가족과 이민자의 삶, 그리고 꿈을 향한 도전을 담담하게 그려낸 드라마입니다. 솔직히 저는 처음에는 그저 잔잔한 가족 영화라고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영화를 다 보고 나서도 한동안 몇몇 장면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1980년대 미국 아칸소의 낯선 땅에서 더 나은 삶을 꿈꾸며 버텨 나가는 한국계 이민자 가족의 이야기는 화려한 사건보다 평범한 일상의 무게를 더 깊게 전해줬습니다. 거창한 감동을 앞세우지 않았기에 오히려 오래 마음에 남는 작품이었습니다.
이 영화가 미국에서 주목받은 진짜 이유
미나리는 제78회 골든글로브 외국어 영화상을 수상하며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짚어볼 부분이 있습니다. 이 영화, 과연 '한국 영화'일까요, '미국 영화'일까요?
영화는 영어보다 한국어 대사가 훨씬 많습니다. 그런데도 골든글로브는 이 작품을 외국어 영화 부문에 분류했습니다. 제작비, 감독, 배경이 모두 미국인 영화를 외국어 영화로 본 셈인데, 당시 한국계 미국인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적잖은 논란이 일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이 논란 자체가 미나리가 왜 특별한지를 잘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미국은 오랫동안 스스로를 이민자의 나라라고 불러왔습니다. 하지만 그 서사의 중심에는 늘 유럽계 백인 이민자가 있었고, 아시아계 이민자는 그 바깥에 머물렀습니다. 미국 영화에서 아시아계 캐릭터는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의 대상으로 소비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여기서 오리엔탈리즘이란 서구가 동양을 신비롭고 이국적인 타자로 바라보며 문화적으로 타자화하는 시각을 의미합니다. 미나리는 그 시선을 정면으로 뒤집습니다. 아시아계 가족이 이웃으로, 보통 사람으로 스크린에 등장합니다.
또 병아리 감별사(chick sexer)라는 직업이 영화에서 중요하게 등장합니다. 병아리 감별사란 갓 부화한 병아리의 성별을 구별하는 전문직으로, 당시 한국인들이 이 분야에서 세계적으로 높은 기술력을 인정받았습니다. 숙련된 기술을 가졌으면서도 사회 구조 안에서 주변부에 머물 수밖에 없었던 아시아 이민자의 위치를 이보다 잘 보여주는 소재가 또 있을까 싶습니다.
- 골든글로브 외국어 영화상 수상 및 한국계 커뮤니티의 분류 논란
- 미국 이민 서사에서 소외됐던 아시아계 이민자의 존재감
- 병아리 감별사를 통해 드러나는 이민자의 사회적 위치
- 오리엔탈리즘적 시선을 뒤집은 보통 가족 이야기
제이콥과 모니카, 누가 옳고 누가 그른 게 아니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이상하게 제이콥과 모니카의 갈등 장면에서 자꾸 멈추게 됐습니다. 제이콥은 아칸소의 척박한 땅에서 농장을 일궈 성공하겠다는 꿈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모니카는 그런 남편이 답답하고, 아이들의 안정적인 생활이 먼저라고 맞섭니다. 누가 틀린 게 아닙니다. 같은 가족을 사랑하면서 그 방향이 완전히 달랐을 뿐입니다.
제가 처음 독립했을 때도 비슷한 감정을 느꼈습니다. 월세와 공과금을 내고 장을 한 번 보고 나면 생각보다 많은 돈이 빠져나갔습니다. 필요한 것만 샀다고 생각했는데도 통장을 보면 금세 여유가 없어졌고, 그제야 부모님이 왜 전등을 끄라고 하셨는지, 물건 하나를 살 때도 여러 번 고민하셨는지 이해되기 시작했습니다. 예전에는 그런 모습이 답답하게만 느껴졌는데, 직접 생활을 꾸려 보니 그건 돈을 아끼려는 습관이 아니라 가족의 하루를 지키기 위한 책임감이었습니다. 그래서 영화를 보며 제이콥의 꿈도 이해됐고, 현실을 걱정하는 모니카의 불안도 이해됐습니다. 결국 두 사람 모두 가족을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다만 그 사랑을 지키는 방식이 서로 달랐을 뿐이라는 생각이 오래 남았습니다.
내러티브 리얼리즘(Narrative Realism)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여기서 내러티브 리얼리즘이란 극적 장치나 과장 없이 인물의 일상적 경험을 있는 그대로 담아내는 서사 방식을 뜻합니다. 미나리는 이 방식에 충실합니다. 가족이 함께 밥을 먹고, 사소하게 다투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다시 하루를 살아갑니다. 한국영화학회에서도 미나리를 디아스포라 영화(Diaspora Cinema)의 대표작으로 언급한 바 있습니다(출처: 한국영상자료원 KMDB). 디아스포라 영화란 고국을 떠나 타국에서 살아가는 이민자 집단의 정체성과 삶을 다루는 영화 장르를 의미합니다.
배우들의 연기도 이 현실감을 뒷받침했습니다. 스티븐 연은 한국어 대사를 매우 자연스럽게 소화해 냈는데, 특히 "회초리 가져와"라는 짧은 대사에서 억눌린 분노와 무력감이 동시에 느껴졌습니다. 한예리는 모니카의 불안과 사랑을 말보다 표정과 호흡으로 전달했습니다. 윤여정의 연기는 한국 관객에게는 익숙한 할머니 캐릭터일 수 있지만, 그 익숙함 자체가 이 영화의 강점이기도 합니다.
평범한 하루를 버틴다는 것의 의미
미나리라는 식물은 척박한 환경에서도 뿌리를 내리고, 한 번 심으면 해마다 돋아납니다. 영화는 이 식물을 순자 할머니가 개울가에 심는 장면을 통해 가족의 회복력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데이빗의 심장병이 차츰 회복되는 흐름과 겹쳐지면서 이 상징성이 더욱 선명해집니다.
그런데 솔직히 저는 영화 중반부에서 속도가 느려진다고 느꼈습니다. 극적인 사건이 거의 없고, 장면 하나하나가 길게 이어지다 보니 집중이 흐트러지는 순간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갈등이 쌓이는 과정에 비해 일부 문제들이 비교적 빠르게 봉합되는 인상도 받았습니다. 현실에서 가족 간의 상처는 그렇게 쉽게 아물지 않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끝난 뒤 오래 남은 건 그 평범한 장면들이었습니다. 미국영화연구소(AFI)는 미나리를 2020년 AFI Award 10대 영화 중 하나로 선정했습니다(출처: American Film Institute). 이 선정 기준이 단순히 오락성이 아니라, 미국 문화와 사회에 기여한 작품을 본다는 점을 생각하면 미나리가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졌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캐릭터 아크(Character Arc)라는 개념을 빌려 설명하면, 미나리의 인물들은 드라마틱한 변화보다 조용한 이해의 과정을 밟습니다. 캐릭터 아크란 이야기 안에서 인물이 경험과 갈등을 통해 내면적으로 변화하는 궤적을 말합니다. 제이콥은 끝까지 고집스럽지만, 화재 이후 모니카의 손을 잡는 장면 하나로 그의 내면이 달라졌음을 전합니다. 말보다 행동으로, 설명보다 장면으로 전달하는 방식이 이 영화의 가장 큰 미덕입니다.
제 기준으로 10점 만점에 7점 정도를 주고 싶은 작품입니다. 훌륭한 수작이라고 단언하기보다는, 미국에서 살아본 경험이 있거나 가족의 무게를 직접 느껴본 사람에게 유독 깊이 다가오는 작품입니다. 제가 직접 겪어보지 않았다면 이 영화의 진짜 맛을 반밖에 못 느꼈을 것 같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미나리는 한국 영화인가요, 미국 영화인가요?
A. 제작사와 감독, 촬영 배경이 모두 미국이지만 대사의 상당 부분이 한국어로 되어 있습니다. 이 때문에 골든글로브에서 외국어 영화로 분류되어 논란이 됐는데, 어느 쪽으로 보느냐보다 어떤 정서를 담고 있느냐로 판단하는 편이 더 적합하지 않을까요? 감독 정이삭은 자신의 유년 시절 경험을 바탕으로 이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Q. 미나리 영화에서 윤여정 연기가 그렇게 대단한가요?
A. 한국 관객에게는 익숙한 유형의 할머니 캐릭터라 특별하게 느껴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미국 관객 입장에서는 그 자연스럽고 거침없는 캐릭터가 상당히 신선하게 다가왔을 겁니다. 결국 윤여정은 제93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여우조연상을 수상했고, 그게 아카데미 입장에서도 의미 있는 선택이었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Q. 미나리가 기생충이나 버닝보다 못한 영화인가요?
A. 단순 비교는 어렵습니다. 기생충과 버닝이 사회 구조나 계층 문제를 치밀하게 파고든다면, 미나리는 그보다 훨씬 조용하고 개인적인 이야기입니다. 어떤 삶의 경험을 가졌느냐에 따라 더 깊이 공명하는 작품이 달라질 수 있지 않을까요?
Q. 미나리 영화가 지루하다는 평도 있던데, 어떻게 보셨나요?
A.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 아니었습니다. 중반부에 실제로 속도가 많이 느려집니다. 다만 그 느린 호흡이 바로 이 영화의 의도이기도 합니다. 극적인 사건보다 일상의 밀도를 보여주려는 선택인데, 그게 맞는지 아닌지는 보는 사람마다 다르게 느낄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결론
미나리는 거창한 성공담을 들려주는 영화가 아닙니다. 꿈을 이루는 이야기도 아니고, 갈등이 깔끔하게 해소되는 이야기도 아닙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오히려 그 불완전함이 오래 남습니다. 제가 처음 독립해서 홀로 생활을 꾸리던 시절, 부모님의 희생이 특별한 사건 속에 있던 게 아니라 평범한 하루하루 속에 숨어 있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던 것처럼, 이 영화도 그런 방식으로 말을 겁니다.
한 번 보고 끝내기보다는, 가족과 함께 본 뒤 서로 어떤 장면이 가장 기억에 남았는지 이야기해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미나리는 누구에게나 같은 감동을 주는 영화가 아니라,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에 따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다가오는 작품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