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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오래 기억에 남는 관계가, 가장 짧게 스쳐 간 사람이었던 적이 있습니까? 저는 《꿈의 제인》을 보고 나서 그 질문을 한참 붙들었습니다. 이 영화는 가출 청소년들이 서로를 가족이라 부르며 만들어가는 '가출팸'의 이야기인데, 따뜻한 청춘 영화라고 생각하고 보면 초반부터 살짝 당황하게 됩니다. 이름도 모르는 사람에게 기댈 수밖에 없는 순간들이, 생각보다 훨씬 오래 마음에 걸렸습니다. 그런데 영화를 다 보고 나니 제가 더 오래 생각하게 된 것은 '누가 내 곁에 남았는가'보다 '누가 잠깐이라도 내 편이 되어주었는가'였습니다.
찰나의 연대가 남기는 것
영화는 가출 소녀 소현이 혼자 남겨진 상황에서 제인을 만나면서 시작됩니다. 제인은 가출 청소년들과 함께 생활하며 아이들에게 '엄마'라고 불리는 인물입니다. 처음 보면 제인은 그저 외로운 아이들에게 잠시 머물 곳을 제공하는 사람처럼 보이지만,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소현에게 제인이 단순히 함께 사는 사람 이상의 존재였다는 것이 드러납니다.
여기서 '가출팸'이라는 개념이 등장합니다. 가출팸은 가출한 청소년들이 함께 생활하며 서로 의지하는 집단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실제 사회에서도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다만 저는 영화 속 가출팸을 단순히 '새로운 가족'이라고 부르는 것은 조금 조심스럽다고 생각합니다. 서로에게 의지가 되는 관계인 동시에, 안정적인 보호체계가 없는 사람들이 모였다는 불안정성도 함께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족사회학에서 혈연이 아닌 관계를 가족처럼 받아들이는 현상을 설명할 때 '선택적 친족 관계(fictive kinship)'라는 개념을 사용하기도 하지만, 가출팸 자체를 이 개념과 동일하게 볼 수는 없습니다.
제인은 아이들에게 케이크 한 조각을 나눠주며 이런 말을 합니다. "죽고 싶지 않다면, 이런 순간을 포기하면 안 된다." 저는 이 장면에서 멈칫했습니다. 삶을 붙잡게 하는 것이 거창한 이유가 아니라 케이크 한 조각이라는 설정이, 조금 과하다 싶으면서도 동시에 맞는 말처럼 느껴졌습니다.
제가 직접 경험한 일 하나가 여기서 겹쳤습니다. 양손 가득 짐을 들고 건물 입구에서 멈칫하고 있을 때, 뒤에서 오던 낯선 사람이 말없이 문을 잡아줬습니다. "들어가세요." 그게 전부였습니다. 그 사람은 이미 잊었을 몇 초를 저는 아직도 기억합니다. 제인이 소연에게 건넨 케이크가 아마 그 문과 비슷한 것이었겠다 싶었습니다. 무게감도 없고, 그래서 오히려 더 오래 남는 것들.
생각해 보면 그 사람은 저를 도와주려고 특별한 결심을 한 것도 아니었을 겁니다. 그냥 문이 닫히기 전에 손을 뻗었을 뿐일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저는 그 짧은 행동을 '친절을 받았다'는 기억으로 오래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즘은 저도 뒤에서 사람이 따라오면 문을 바로 놓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 사람이 그날의 저를 기억하지 않는 것처럼, 저도 제가 문을 잡아준 사람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할 겁니다. 그래도 행동은 다음 사람에게 옮겨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선택적 친족 관계(fictive kinship): 혈연 없이 자발적으로 형성되는 비공식 가족 유대
- 가출팸은 제도권 밖 청소년들이 서로를 보호하기 위해 만드는 생존 공동체
- 영화 속 연대는 거창한 약속이 아니라 케이크·김밥 같은 일상의 행위로 표현됨
- 짧은 접촉이라도 상대에게 '혼자가 아니다'라는 감각을 남길 수 있음
관계가 끊겨도 남는 것이 있는가
영화에서 제인의 죽음은 갑작스럽게 찾아옵니다. 제인의 마른 몸과 식사에 대한 모습 때문에 섭식장애를 연상하게 하는 부분도 있지만, 영화는 그 원인을 명확하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저는 오히려 이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 제인이라는 인물을 더 불안하고 쓸쓸하게 만든다고 느꼈습니다.
제인이 사라지자 가출팸은 흩어집니다. 아이들은 제인이 남긴 김밥을 먹고 산자락에 제인을 묻어줍니다. 그리고 각자 갈 길로 떠납니다. 소연은 다시 혼자가 됩니다. 이 장면에서 저는 '관계가 끊기면 그것으로 끝인가?'라는 질문을 하게 됐습니다.
영화는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제인이 소연에게 했던 말과 함께 나눴던 케이크 한 조각은 제인이 사라진 후에도 소연에게 남아 있습니다. 제인이 곁에 있을 때는 그저 한 사람이 건넨 말과 행동처럼 보였지만, 제인이 사라지고 나서야 그것들이 소연의 생각과 행동에 영향을 주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이런 변화는 심리학에서 말하는 '내면화(internalization)'와 연결해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누군가와 관계를 맺으면서 들었던 말이나 경험했던 행동 방식이 자신의 생각과 행동에 스며들어, 상대가 곁에 없어도 계속 영향을 주는 현상입니다. 물론 영화 속 소연의 변화를 하나의 심리학적 개념으로만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저는 다만 제인의 말과 행동이 소연 안에 남아 있다는 점을 이런 방식으로 이해했습니다.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저는 처음에 이 영화를 연대의 따뜻함을 그린 이야기라고 읽으려 했는데, 보고 나서는 오히려 '관계가 사라진 후에도 그 흔적이 어디에 남는가'를 묻는 영화에 더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인은 소연을 구하려고 한 것도 아니고, 소연도 제인에게 충분히 다가가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제인의 흔적은 소연 안에 남습니다.
제 경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짐을 들고 문 앞에 서 있던 저를 도와준 그 사람의 얼굴도, 옷차림도 기억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로 저는 비슷한 상황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않게 됐습니다. 그 사람은 저에게 행동 방식 하나를 남겨두고 갔습니다. 관계의 지속 여부와 무관하게. 제 경험상 이건 좀 다릅니다. 기억에 남는 건 그 사람이 아니라, 그 사람이 제 안에 남긴 방식이었습니다. 예전에는 좋은 관계라면 서로의 이름과 얼굴, 함께했던 시간이 오래 남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꼭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은 이름조차 모르는데도 내가 다른 사람을 대하는 방식을 바꿔놓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저는 영화 속 관계를 무조건 아름답게만 보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제인을 통해 누군가에게 잠시라도 따뜻함을 건네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동시에, 왜 이 아이들이 가족이 아닌 낯선 사람에게서 그런 따뜻함을 찾아야 했는지를 묻고 싶었습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가 되는 것은 분명 좋은 일이지만, 그 관계가 유일한 안전망이 되어버린다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저는 이 지점에서 이 영화가 단순히 '외로운 사람들이 서로를 위로하는 영화'보다 더 무겁게 느껴졌습니다. 누군가의 친절이 고마운 것과, 친절 외에는 기댈 곳이 없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꿈의 제인》은 어떤 영화인가요?
A. 조현훈 감독의 한국 독립영화로, 혼자 남겨지는 것이 두려운 소현이 제인을 만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룹니다. 가출팸과 트랜스젠더 여성 제인이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외로움, 가족, 관계와 연대의 의미를 다루며, 꿈과 현실이 섞이는 독특한 구조가 특징입니다. 단순한 성장 영화라기보다 관계가 사람에게 무엇을 남기는지를 생각하게 하는 작품이라고 느꼈습니다.
Q. 가출팸이 실제로 존재하는 현상인가요?
A. 네, 가출팸은 가출한 청소년들이 함께 생활하며 서로 의지하는 집단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실제 사회에서도 사용됩니다. 다만 영화 속 가출팸을 단순히 따뜻한 대안 가족으로만 보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서로에게 의지가 되는 동시에 안정적인 보호체계가 부족하기 때문에 여러 위험에 노출될 수 있는 관계이기도 합니다.
Q. 제인은 소현에게 어떤 의미의 인물인가요?
A. 저는 제인을 단순한 보호자나 구원자로 보기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소현에게 잠시 머물 곳과 함께할 사람을 제공하면서, 이전에 충분히 경험하지 못했던 관계의 모습을 보여주는 인물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제인이 사라진 뒤에도 소현에게 제인의 존재가 계속 영향을 미친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Q. 이 영화는 어떤 내용을 다룬 영화인가요?
A. 《꿈의 제인》은 가출 청소년 소현이 제인을 만나면서 관계와 가족의 의미를 경험하는 과정을 그린 영화입니다. 가출팸이라는 불안정한 공동체를 배경으로 외로움, 가족, 연대, 상실을 다루며, 제인이 소현에게 어떤 영향을 남겼는지를 중심으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단순히 누군가를 구해주는 이야기라기보다, 잠깐의 관계가 한 사람의 삶에 어떤 흔적을 남길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결론
《꿈의 제인》을 보고 나서 저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 항상 오래 지속되는 관계는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짧게 스쳐도, 심지어 끝이 좋지 않아도, 어느 찰나에 '나 혼자가 아니구나'라는 감각을 주는 것만으로 충분한 때가 있습니다. 제인이 소연에게 그랬고, 이름 모를 누군가가 짐을 든 저에게 문을 잡아준 것이 그랬습니다.
제가 이 영화에서 가장 오래 생각하게 된 건 마지막에 나오는 "죽지 말고, 불행하게 오래오래 살자"라는 말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냉소적인 말처럼 들렸습니다. 그런데 영화를 다 보고 나니 오히려 그 안에 이상할 정도로 현실적인 위로가 들어 있다고 느꼈습니다. 삶이 항상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더라도, 그 안에서 케이크 한 조각 같은 순간을 놓치지 말자는 말처럼 들렸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면 제가 문을 잡아준 사람에게 받은 것도 거창한 구원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몇 초 동안 문을 잡아준 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런데 그 짧은 친절이 제 안에 남아 다른 사람에게 다시 건너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좋은 관계가 반드시 오래 지속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게 됐습니다.
오래 함께하지 못하더라도, 누군가의 하루를 조금 덜 외롭게 만들어줄 수는 있습니다. 그리고 그게 어쩌면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남길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흔적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영화를 아직 보지 않은 분이라면, 각오하고 보시되 끝까지 보시길 권합니다.
이 영화를 보고 난 뒤 제가 가장 오래 붙잡게 된 질문은 '누가 나를 구해줄까'가 아니었습니다. '나는 누군가에게 어떤 흔적을 남기고 있는 사람일까' 그 질문을 생각하다 보니, 예전에 제게 문을 잡아줬던 이름 모를 사람도 다시 떠올랐습니다. 아마 그 사람은 제가 아직도 이 일을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를 겁니다. 그래서 이제는 저도 가끔 문을 조금 더 오래 잡습니다.